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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설화(都彌說話)의 극적인 순애보의 제작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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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스톰 2024. 3. 5.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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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설화(都彌說話)의 극적인 순애보의 제작의도

 

설화의 대강 줄거리

     도미설화는 삼국사기열전에 실려 있다. 내용은 매우 극적이다. 도미는 가난한 평민이었으나 의리를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 행실이 곧아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개로왕이 이를 듣고 도미의 아내를 탐냈다. 그는 도미를 불러다가 "부인의 덕은 정절이 제일이지만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도미는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지만 신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더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아내에 대해 확신을 보였다. 이를 시험하기 위해 개로왕은 도미를 잡아두고 가까운 신하를 왕으로 꾸민 후, 도미의 아내에게 보내 "도미와의 내기에서 이겨 너를 궁녀로 삼게 되었으니 너는 내 것이다"라고 속였다. 이에 도미의 아내는 몸종을 자기처럼 단장시켜 들여보내 왕의 일방적인 횡포에 맞섰다. 그 뒤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되자 화가 난 개루왕은 도미의 두 눈을 뺀 다음 멀리 보내버리고, 도미의 아내를 범하려 했다.

    도미의 아내는 몸을 씻고 오겠다며 궁을 탈출했으나 강가에 이르러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자 하늘을 우러러 크게 울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조각배 한 척이 밀려왔다. 올라타니 배가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렀는데, 눈먼 도미가 거기에 살아 있었다. 극적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갖은 어려움 끝에 고구려 땅에 도착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내용으로 보아 반 백제의 세력이나 고구려 측에서 이 설화를 제작할 수도 있겠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과연 왕이 평민부인에게 당할 수 있었나?

    설화 내용을 간추리면 왕이 천한 백성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 실패했다는 것이 사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의 일방적인 횡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하층민의 의지를 표현했다고 보면, 이 설화에는 뜻하는 바가 긴박감있게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개로왕의 폭정을 고발하거나 개로왕의 인성을 부정적으로 왜곡하고잫샜던 흔적이 보인다. 중국 측 사료인 송서에 의하면 개로왕은 457년 송에 사신을 보내서 진동대장군 관작을 제수받았다. 이듬해에는 개로왕의 신하 11명에게 관작을 제수해 달라고 요청해 이들에게 장군직을 수여한 기록이 남아있다. 11명의 관리들 중 8명이 왕족인 부여씨였으며, 3명만 성씨가 다른 귀족이었다. 백제의 유력 가문인 진씨나 해씨가 없는데, 선왕인 비유왕 대에는 해씨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지만 개로왕대에 거의 숙청되었다. 선왕인 비유왕의 유해가 20여 년 동안 방치된 것을 보면 이 시기에 해씨 등 유력 귀족과 개로왕의 갈등이 극단적이었을 것이다. 개로왕은 권력 구조를 재편하면서 부여씨 왕족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정로장군 좌현왕에 임명된 부여곤지는 개로왕의 태자로 추정되며, 보국장군에 임명된 부여문주는 상좌평에 올라 국정 전반을 총괄했다. 부여씨 왕족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사가제(私假制)적 질서를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귀족 세력들과의 갈등이 증폭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이 즉위한 뒤 야마토에서 아레나코(阿禮奴跪)를 사신으로 보내 궁녀로 쓸 여자를 물색했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 적계여랑(適稽女郞)을 일본에 보냈는데, 그녀가 이시카와노 타테(石川楯)라는 남자와 불륜을 저질러 둘이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3년 뒤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와 논의끝에 왜국에 여성 왕족을 보내는 정책을 폐기한다. 이런 사료를 바탕으로 보면 개로왕의 여성문제는 누군가에 의해 설화로 제작된 부정적 서사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개로왕은 누구인가.

     백제의 제21대 군주로서 백제의 유능한 왕이었지만 실제로는  기구한 운명의 군주이며, 책계왕, 성왕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은 백제의 군주 중 한명이다. 초기에는 광개토대왕과 협력하여 젭제를 키운 왕이다. 그러나 만년에 고구려와의 하북위례성 전투에서 패배후 아차산에서 죽은 비극적 주인공이다. 당시 아차산은 한산이라고 불렸는데 북방의 위협을 피해 한강을 건너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한 왕도 개로왕이다. 하북 하남 위례성 둘 다 남성과 북성 두개의 성으로 이루어졌다. 하남위례성의 남성은 몽촌토성이고 북성은 풍납토성이다. 예전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고 고구려와 전쟁에서 승리 후 고구려 남평양성을 빼앗아 하남위례성에서 하북위례성으로 재천도한다. 그런데 백제가 하남위례성에서 하북위례성으로 재천도한 이유는 도읍의 협소함과 한강과 지나치게 가까운 위치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위협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사왕과 아신왕 그리고 개로왕을 거치면서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며졌지만 장수왕의 공격으로 7일만에 함락된다. 전투 중에 하북위례성의 북성인 현재 아차산성(아단산성)으로 피신하던 개로왕은 고구려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그래서 전사한 비극적인 왕의 도미설화는 더욱 그를 비극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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