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게임 – 오정희
저녁의 게임 – 오정희
줄거리 요약
작품의 줄거리는 과거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혼기를 놓치고 악성 빈혈에 시달리는 노처녀이며, 아버지는 위장을 반 넘게 잘라 내고 정기적으로 인슐린을 주사해야 하는 삶에도 애착을 갖는 환자이다. 둘은 오빠의 부재를 생각날 때마다 확인하며 저녁식사를 한다. 어느 날 문득 사라진 오빠로 인하여 나와 아버지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나는 생활 곳곳에서 오빠의 존재를 확인하며 놀라고, 아버지 역시 하루에 열번 정도는 우편함을 열어 보고 화투패의 운수를 떼면서 오빠를 기다린다. 기다림으로 서성대는 아버지를 나는 공범끼리의 적의와 친밀감으로, 그리고 준비되어 있는 배반감으로 지켜본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부녀는 뒷면만 보아도 훤히 알 수 있는 화투를 가지고 게임을 한다. 속임수임을 알면서 벌이는 화투놀이란 끊임없이 해대는 연극이며, 거짓말인 줄 알면서 나누는 대화는 단순한 부조리극의 대사이다. 오빠에 대한 기억 못지않게 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어머니의 비극적인 삶이다. 기형아를 낳은 뒤 아이를 살해하고 미쳐서 기도원과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나는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갖는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 수단으로 자신을 학대한다.
버려지는 아이들
오정희의 단편처럼 출산, 낙태, 영아살해, 영아방기, 등의 삶과 죽음이 맞닿은 작품들도 흔치 않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무엇보다도 모성의 주체로써 그 다산성이 특징이다. 이는 아마도 아이를 많이 낳은 작가 자신의 모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인거리에서도 어머니는 여덟 번째 아이를 낳으며 작중 화자도 초조를 만나 어머니의 뒤를 이어 임신가능성을 내비친다.
완구점 여인에서 후에 어머니의 위치로 변한 후 계속 아이를 출산하는 여자는 다산성과 여성성은 드러나지만 모성애는 비교적 차갑게 그려진다. 아직 아이를 낳을 만한 나이가 되지 못한 소녀는 아이 대신 백개의 오뚜기 인형을 사 모음으로써 역시 다산성을 모방하고 있다.완구점 여인에서 오뚜기 속에 오뚜기가 들어있는 인형도 역시 다산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삶의 중첩과 인과의 법칙이며 바로 윤리의 고리인 셈이다. 이 인과성의 세계에 또 다른 작품인 저녁의 게임이 놓여있다.
네 아버지의 생활이 문란해서 그런 거야. 머리통이 물주머니처럼 무르고 크게 부풀어오른, 연골체의 갓난 아이를 가르키며 어머니는 조숙한 중학생이던 오빠에게 노래하듯 말했다. (저녁의 게임, 253쪽)
아이들은 작중에 익명성 혹은 무차별성으로 나타나는데 저녁의 게임에서의 기형아나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기아의 현상은 무차별적이고 다양하지만 익명적으로 통합된다.
아가, 날 데려다 줘, 여긴 무섭고 쓸쓸하단다. 어머니는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처럼 크고 비뚜뚤비뚤한 글씨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여백마다 동체는 없이 공처럼 둥근 머리오 나무가지와 같이 뻗은 팔과 다리로 물구나무를 선 사람들을 그려넣었다(저녁의 게임 259쪽)
완구점 여인의 오뚜기처럼 저녁의 게임에서 죽은 엄마가 그려놓았던 아이들의 모습 역시 팔다리가 없는 익명적 아이들의 피해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러한 비극성은 대개 오정희 소설의 배경을 이룬다.
생명체의 혼돈
버려지는 아이들과 모성성은 방기는 천륜개념에서 보면 상반되지만 사실 모자관계의 정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이다. 여자들은 어둠 속에서 피흘리며 아이를 낳고 아이들은 어둠 속에 버려진다. 태어남이 곧 죽인 혹은 상실로 이어지는 오정희 특유의 비극성이 형상화되는 것이다. 아이와 어머니니의 분리라는 사실은 생사의 분리와 같다. 낙태수술 후 천주교에서 경영하는 반 지하의 병실에 입원중인 “번제”의 주인공, 태내에서 살해된 아이를 떠올려보려고 애쓰는 “봄날”의 인물은 결국 임싱 중절수술 후 간질에 걸리고 만다. 또 “파로호”의 주인공인 혜순은 칠년 전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나 파로호에 남편과 놀러갔다 온 후 아이를 지웠고, 안개의 둑에서는 주인공 아내가 세 번의 유산 경험이 있으며 “불의 강”에서 갓난아이는 돌이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신한 탈수증으로 죽었다. “중국인거리”의 혼혈아들은 결국은 죽어갈 것이며 “완구점 여인”의 이복동생들은 태어나는 족족 죽었다. “저녁의 게임”의 엄마는 갓난애를 죽이고 병원의 응급실에 호송차로 실려갔다.
수많은 낙태와 유아방기 혹은 모성성의 상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인과적 세계에서는 언제나 결과에 대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의 죄악과 문란한 삶에서 오정희는 그 원인을 보여주고 있다. “완구점 여인”이나 “중국인 거리”에서의 비윤리적인 성관계, 원치 않는 출산, 그리고 “불의 강”이나 구부러진 길 저쪽에서 미혼모의 유아방기는 아버지의 부재가 원인이고 무책임하고 문란한 남성주도적 섹스가 원인이 될 수 있다. 버려지는 아이들의 익명성은 아이들을 책임져서 이름을 달아줄 부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는 전망 없는 비극적 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정희 소설에서 희망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작품에서 명쾌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어둠과 물과 아이의 이미지를 통한 상징성 분석으로 작가의 심증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의 따뜻한 시선
작중인물의 긍정적인 시각이나 자라나 버려진 아이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작중의 중요한 소재로써 작품의 배경으로써 사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버려진 아이에 대한 오정희의 시선은 끝까지 부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출산이라는 생명 생산의 주체인 여성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독자에게 건져주는 작가는 긍정적 시선을 유지한다. 그리고 여성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독자에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