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왜 쓰는가.
소설은 왜 쓰는가.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소설을 왜 써요?
소설을 왜 쓰는가의 문제는 왜 읽는가의 문제와 일맥상통한다. 소설을 쓰는 것은 작자의 몫이고, 읽는 것은 독자의 영역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다면 소설이 쓰여질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최소한의 사회적 조건이 있어야 성립되는 사회적 현상이며 존재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사람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무엇인가 하는 바는 문학이 무엇인가를 거쳐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의 불가지론을 넘어서 보다 구체적이고 기초적인 질문으로 단서를 찾을 필요가 있다.
질문의 답을 찾아 곰곰 생각하기
질문의 실마리를 잡자면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류의 발달사를 살펴보면 자연과학에 비해 인문과학의 진보 속도는 너무나도 늦다. 아니 진보라는 판단을 할 수 가 없다. 자연과학의 진보는 얼마나 눈부신가. 손으로 하던 일을 컴퓨터나 기계가 대신하고 있고 두발로 걷고 뛰던 이동의 수단은 초고속 열차와 비행기 심지어 우주선이 대기권 밖으로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철학이니 문학이니 하면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누구도 공자보다 현학적이지 못하고 소크라테스보다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부처보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보다 잘 꿰뚫고있는 자인가. 누가 예수보다 예언을 잘 할 수 있는가.
진보의 순서로 보면 역사는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지 않은가. 종교의 문제는 실로 철학적 인식의 진보적 방향을 막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발전적인 사고의 틀을 개조시키는 어떤 변화의 요소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구태의연한 틀을 만들어 그것에서 한발도 나아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유로운 사고나 무한한 상상력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는 철학을 회의론으로 몰아갔고, 인간은 스스로 자기 내부에 침잠하며 그 속에서 자아를 인식하려 하고 있다. 자아인식이라는 인간내부의 속성은 외부의 모든 객관성을 끊고 자신 찾기에 몰두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신에게 선택될 것인가에 대해 초조하게 내면은 어두운 구석구석을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결국 신에게 의지한다.신이라는 절대 존재는 너무도 위대하다. 우리는 감히 그의 영역을 추론해보거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볼 수조차 없다. 그토록 위대한 그의 장난에 불과한 천지창조는 우리에게는 바로 생명 그 자체이나 신의 섭리 중 작은 그 어떤 하나에 불과하다.
소설은 삶과 별개인가
인간은 경험적 세계에 살고 있다. 다만 이상적 세계를 꿈꾸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상적 세계에 매달리며 경험적 사실을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심지어 이상적 세계만을 인정하여 경험적 세계를 거기에 종속시키기까지 한다. 그것은 이상적 세계와 경험적 세계가 단절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에서 양자의 통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연결 고리가 생물학적이건 혹은 사회와 역사의 연속이건 간에 양자는 하나로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양자에 모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이 피조물로서 암흑의 나날을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인간을 그 자신 속에서 구제해준 사건 중의 하나가 인류에게 문학이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피조물의 위치에서 조물주의 위치로 자신을 격상시키는 노릇이 된다. 창작자의 창의성은 스스로에 기인하기 때문에 그는 그 순간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독자 또한 새롭게 태어난 세계를 접하면서 제이의 창조자가 되는 기쁨을 맛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소설창작은 장난인가.
누군가는 소설이 한낱 말장난이라고 치부하는 경우도 본 적이 있다. 말하자면 지어낸 이야기는 거짓말 놀리와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인간이 만들어낸 소설의 세계는 허구인 것이다. 현실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창조하는 허구의 세계는 현실 세계와 단절될 수 없다. 현실에서 취재된 텍스트의 세계는 어떻게 해서든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때 작가는 자신의 현실 혹은 현실에서 발단된 상상을 자신의 작품에 적응시키게 된다. 이렇게 변화되고 재구성되는 방법과 결과에 의해 소위 예술적, 소설 미학적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결국 소설에는 하나의 테두리라고 할 수 있는 성격, 형식 등의 규정이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소설이라는 존재물을 다른 그 무엇과 구별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인간들을 기쁘게 슬프게 혹은 자신감을 갖게만드는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