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염상섭- 삼대의 가문 몰락 이후의 스토리
<무화과>염상섭- 삼대의 가문 몰락 이후의 스토리
두 작품의 긴밀한 연계성과 후속작의 의미
염상섭의 <삼대에>에서 조의관의 가문이 점차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그 속작 <무화과>에서는 마지막 세대인 손자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양상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무화과」는 「삼대」의 후속작이라는 조건으로 집필된 것이다. 그리고 염상섭은 삼부의 작품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두 작품에는 연작에 나타난 공통 부분과 창작수법의 일관성이 나타난다. <무화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삼대와 연결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대 --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 조덕희, 김병화, 홍경애, 이필순
무화과--이의관, 이정모, 이원영, 이문경, 김동국, 최원애, 조정애,
위에서 보듯이 작중 인물들은 이름만 바뀌어 모두 등장하고 있으며 인물의 성격이나 시대적 배경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무화과에 새로 등장하는 인물로는 김봉익, 박종엽, 채련(김보희), 김홍근, 이탁 등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인물들이 가세하여 벌이는 세계상은 음모와 타락한 자들의 물욕으로 가득찬 그것이다. 염상섭이 작품 소개의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모 대의 비트러진 꽃조차 부재한 꼿없는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아이러니하다. 무화과의 의미는 무엇일까. 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여기서 꽃이라는 상징성은 조국의 독립, 내지는 조국이 있는 한 그 국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혹은 그 국민이 해낼 수 있는 어떤 자유로운 부분이 될 것이다. 염상섭은 당대를 끝없는 시대임을 강조한다. 또한 작가는 제목 속에 아이러니를 숨겨 두었다. 꿏이 없는 과일이라는 「무화과」라는 상징적 제목과 실제 내용에서의 거리를 지적할 수 있다. 이 작품이 매우 현실성 있는 작품이 된 것은 작가가 형상화한 가상의 세계가 실제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부분을 면밀히 훑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30년대의 자본주의적 사회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작중 인물과 연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 당시 가족의 물락이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저항하지 않는 지식인의 퇴행과정
<무화과>는 일련의 작품 군에서 그 저항성이 사라져가는 것으로 보인다. 삼대에서 조덕기가 보여준 동정자의 활약이나 김병화라는 주의자의 저항운동은 방향을 잃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대감각의 결여상태로 혹은 삼대와 같은 저항 중심의 세계가 혼미해졌다는 의미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 구조의 결속 관계인 동정자와의 세계가 파탄되었기 때문으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외부 세계의 깊은 다른 세계에서는 이원영의 후신이 될 만한 완식이가 자라나고 있고 중심을 잃은, 다시 말해 김동국이 떠나간 자리에서 주의자 김봉익이 인식의 변화를 보이면서 의미심장한 인물로 형상화되어 적의 심장부인 동경을 향해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시대감각이 결여되었다거나 혼미해진 저항정신이 파탄에 이르렀다고 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두 작품의 연작관계는 작품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삼대」에서 이야기가 그대로 이어지는 「무화과」는 그 작중인물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결국 신문사를 운영하는 이원영은 삼대의 조덕기처럼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성격을 사라지고 그 퇴행속에서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안위만을 찾기에 몰두하게 된다. 결국 시대상황 속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형국인 되고 만 셈이다.
조덕기의 후신 이원영은 어떻게 몰락해가는가
조덕기의 자리를 물려받은 이원영은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 사회사업 내지는 사회의 명예적 지위를 얻으려 노력한다. 이원영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신문사에 3만원을 기부하고 이사 자리를 얻었으나 신문사의 재정난으로 만오천원을 더 내놓고 아예 신문사 재정을 관리하는 영업 국장 자리를 맡게 된다. 사업에 경험이 없는 이원영은 겁이 나기도 하고 자리를 돈주고 산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으나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신문사 측의 설득에 말려들고 만다. 원하지 않는 일을 주위의 압력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억지로 떠맡다시피 영업 국장 자리를 맡게 되면서 앞으로도 파업이나 재정 문제가 있으면 추가로 돈을 내어놓게 되어 있어서 불리한 조건으로 신문사 임원으로 있게 된다. 더욱이 그런 자리에 나가려는 것도 놀고만 있기 싫고 사회 실무를 익혀 보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촉발되었다. 결국 그 동기가 매우 소극적이며 무능력한 유산상속자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능력자의 사회 진출은 자신이 욕망하는 일이 아닌 타의에 의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중도론자 조덕기에서 보수주의자 이원영으로 돌아간 동정자는 자기 모순에 빠진다. 보수주의 세계관의 하나인 공명심에 젖어서 신문사 임원이라는 사회 진출은 능력의 한계에서 이용만 당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결국 타락한 보수 노선에서의 사회 진출은 타락한 세계관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이원영은 순진한 생각으로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인물들과 맞서다가 파탄하게 된다. 이원영의 모순점은 보수 노선의 깊숙한 곳에서 동정자적인 세계관을 가졌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원영의 몰락을 보면서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은 진보 혹은 보수라 자처하면서 자신의 노선이나 철학을 잊고 다른 노선을 기웃거린다거나 신념과 동지의식이 없는 사람들도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월이 흘러도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가 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란 어려운 노릇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