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의 탄생신화.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의 탄생신화.
석탈해왕에 대한 여러 가지 설화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 《삼국유사》 권1의 〈기이(紀異)〉 탈해왕조와 권2의 〈가락국기(駕洛國紀)〉 등에 실려 있는 신라 제4대 왕이자 석씨(昔氏) 왕조의 시조인 탈해왕의 탄생신화를 말한다. 그는 원래 용성국왕 혹은 다파나국왕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이지만 알에서 태어난 비정상적 출생으로 인하여 버림받고 숱한 시련을 극복한 뒤 결국 신라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왕은 왜국(倭國)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다파나국의 왕이 여국(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왕비는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이를 상서롭지 않은 일로 여겨 버리게 하였으나,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비단에 보물과 함께 알을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궤는 파도를 타고 가다 먼저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그곳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혁거세 재위 39년에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 어귀에 닿았다. 해변에서 아진의선라는 한 노파가 궤를 건져 열어 보니 아이가 들어 있었고, 노파가 기른 아이는 장성하여 키가 9척에 풍모와 지식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은 궤가 바다에 떠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며 따라왔다고 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변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담긴 궤를 풀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이름은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탈해는 노파를 어머니로 삼아 고기잡이로 봉양하다가 노모의 말을 좇아 학문에 정진하고 지리를 익혔으며, 나중에 양산의 호공(瓠公) 집을 길지(吉地)로 여겨 계책을 써서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이 훗날의 월성(月城)이다. 남해왕이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은 뒤 대보(大輔)로 등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이 임종할 때 나이 많고 어진 사람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선왕인 남해왕의 뜻에 따라 자신이 왕이 되었다며, 자신도 왕위를 탈해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의 탈해왕조에는 출생지가 용성국(龍城國)이며, 함달파(含達婆) 왕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 낳았다고 한다. 용성국은 다파나국과 마찬가지로 왜국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정명국(正明國) 또는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알로 태어난 탈해는 칠보(七寶)·노비와 함께 커다란 궤에 넣어져 배에 실려 바다를 떠다니다가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에게 발견되었다. 탈해는 키가 9척 7촌, 머리둘레가 3척 2촌에 달하는 거구로 묘사되어 있고, 사후에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소천구에 장사지낸 자신의 뼈를 들어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 하였으며 이후 동악신(東岳神)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낳은 알이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라고 하였으며, 키가 3척, 머리 둘레가 1척에 불과한 왜소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탈해는 바다를 건너 가락국의 수로왕을 찾아가 왕위를 내놓으라며 도술을 겨루었으나 패하고 계림 땅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석탈해신화[昔脫解神話]의 이상한 점들
도술을 부릴 줄 아는 석탈해는 왜 용성국에서 쫒겨 났을까? 그리고 신라에 정착한 이후 원래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용성국으로 돌아가거나 국가간의 관계를 맺지도 않았을까? 박혁거세 치세기간 동안에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2대왕인 남해왕의 사위이기도 한 석탈해가 본명을 밝히지 않고 권력을 잡은 후에도 용성국에 가지 않은 것은 이미 그의 선왕인 함달바왕이 실권을 했거나 석탈해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고 추측이 된다.
남해왕의 적자도 아니고 유리왕의 아들도 아니어서 박씨가 아닌데 어떻게 왕이 되어서 석씨왕족을 일구었을까? 실제로 김알지의 후손이 왕위이 즉위하기 전까지 석탈해의 후손들이 신라의 왕노릇을 했다. 그런데 석탈해의 부인은 남해왕의 딸이다. 그녀의 성은 박(朴)씨이고 아니부인(阿尼夫人) 혹은 아로부인(阿老夫人)이라고도 한다. 신라 제2대 왕 남해왕(南解王)과 그 비인 운제부인(雲帝夫人) 사이에 맏딸로 태어났다. 남해왕 재위5년 배 안의 괘에서 나온 석탈해(昔脫解)가 슬기롭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시집보냈다.
남해왕이 죽은 후 아들 유리(儒理)가 탈해에게 왕위를 사양하려 하자, 탈해가 이[齒]가 많은 사람이 왕이 되기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두 사람이 떡을 물어 시험해본 결과 유리의 이가 많으므로 그가 왕이 되었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석탈해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아효부인은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각간에 오른 구추(仇鄒)를 낳았고 그는 신라 재 구대왕에 즉위했다. 이것은 박씨인 아효부인의 영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여왕을 즉위시킬 정도로 성별의 구애됨 없는 권력의 분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알지의 후손이 다시금 왕이 되어 세가지 성이 왕을 차지했는데 그 문을 처음 연 것이 바로 석탈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