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 황조가에 숨겨진 설화
유리왕 황조가에 숨겨진 설화
유리왕의 고뇌가 숨어 있는 노래
翩翩黃鳥(편편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念我之獨(염아지독)
誰其與歸(수기여귀)
이 시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자의 주관적인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객관적인 대상을 동원하여 화자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기의 처지나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황조가의 성격에 대해서는 서정시로 보는 입장과 서사시로 보는 입장이 있다. 서정시로 보는 견해는 유리왕이 지은 개인 서정시로 보는 경우와 구비 전승되는 서정민요로 보는 경우로 나누어진다. 한편 서사시로 보는 견해에서는 이 작품을 부족 간의 통합 과정에서 나타난 집단의 갈등을 표현한 노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몽에 이어 고구려를 계승한 유리왕은 선대왕의 많은 세력들이 고구려는 떠나 남하하여 백제를 세우고 고구려 땅에 남은 세력들조차 유리왕이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했다 그는 즉위한 후,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고, 권력을 가진 여러 세력들에 의해 시달리는 와중에 처첩 간의 갈등이 노정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고뇌의 배경이 이 시에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황조가의 배경설화
고구려 제2대 유리왕 3년 10월에 왕비 송 씨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를 후실로 맞아들였는데, 한 사람은 화희(禾姬)라는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사람은 치희(雉姬)라는 한(漢)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사랑 다툼으로 서로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궁과 서궁을 짓고 따로 머물게 했다. 그 후 왕이 기산에 사냥을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은 사이에 두 여자가 다툼을 벌였다.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나라 집안의 천한 계집으로 어찌 이리 무례한가?- 하면서 꾸짖으니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한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은 이 사실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유리왕이 치희를 설득하려다가 실패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화희가 버티고 있는 한, 치희는 회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유리왕이 실망하여 돌아오는 길에 마침 나뭇가지에 꾀꼬리들이 모여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아마도 한나라 세력이 아쉽고 또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치희가 그리웠을 수도 있겠다.
애틋한 로맨스가 숨겨진 노래
황조가는 B.C. 17년, 유리왕 즉위 3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서정시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4언 4구의 한시로 번역되어 전해진다. 매우 짧은 노래이지만, 그 속에는 대칭적인 균형과 탄탄한 시상 전개를 갖추고 있다. 사랑하던 짝을 잃은 고독감과 슬픔을 자연물인 꾀꼬리를 매개로 하여 우의적(寓意的)으로 형상화하였는데, 짝을 이루어 노니는 꾀꼬리와 홀로 있는 자기자신, 정다움과 외로움, 가벼움과 무거움이 대립되고 중첩되면서 화자의 정서가 효과적으로 부각된다. 또한 자연물에 의지하여 시상을 일으킨 후 나중에 자신의 감회를 펴는 선경후정(先景後情)의 표현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문학성이 드러난다. 그런데 평야 출신이 화희 소위 벼농사 세력출신의 여자와 북방의 한나라 산악지역의 치희, 즉 꿩으로 상징되는 세력을 발판으로 나라를 일으키려 한 유리왕에게 시련이 닥친 것이다. 두 여인의 간의 갈등으로 한 여인도 잃고 한나라 측의 세력도 잃은 것이다. 로맨스가 깨졌을 뿐만 아니라 군사, 정치적으로로 난관에 부딪쳤다고 할 수 있다. 유리왕은 선왕인 동명성왕과 달리 신화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고난을 겪는 평범한 인간이다. 따라서 그의 배경 설화에는 화희와 치희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거나, 부자 간의 갈등 때문에 자신의 해명태자를 죽게 하는 등 인간적 갈등의 모습이 드러난다. 결국 황조가는 신화적 세계관이 무너지면서 드러나는 개인적 갈등과 좌절을 노래한 개인 애정사와 정치적 권력의 노골화 등이 드러난 시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