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공부

견훤은 아자개의 아들인가?

북스톰 2024. 3. 14.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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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아자개의 아들인가?

 

견훤의 탄생설화와 친부 아자개

     견훤의 탄생 설화는 소위 야래자형설화(夜來者型說話)로 불린다. 설화의 분류상 이물교구설화에서도 따로 장르가 분류된 설화인 것이다. 야래자(夜來者)란 풀어 말하면 밤마다 찾아오는 정체불명의 외부인을 일컫는다, 설화 속 밤손님이라 자는 멀쩡한 처녀 인생을 망친 범죄자다. 밤마다 처녀의 방에 찾아와 성관계를 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밤중에 통성명도 없이 무단 침입해 자기 욕망만 채우고 돌아가는 짓의 반복이기 때문에 괴물 같은 남자이다. 그런데 그 후손은 훗날 비범한 인물이 되지만, 정작 야래자는 아비 명함도 못 내밀고 사라지는 운명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견훤의 탄생설화가 바로 이물교구설하중에서 지렁이가 인간으로 화한 야래자 설화이다. 본래 견훤의 아버지는 지렁이라는 설화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아자개라는 인물의 견훤의 친부로 알려져있다. 그렇다면 아자개가 지렁이이거나 아니면 견훤의 친부가 아자개가 아니고 지렁이란 말이 된다.

 

견훤의 탄생설화 내용

     신라 지방 토호의 아름다운 딸이 항간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자 아버지가 다그치니, "밤마다 흰 얼굴에 보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방으로 드나든다"는 것을 실토하지만 "그 정체를 모르겠다"고 한다. 아비가 꾀를 내어 "그 남자의 옷에 실이 묶인 바늘을 꿰어두라"고 이르고 딸이 그 말대로 하니, 남자가 이를 눈치채고 자신은 천상에서 내려왔으며 딸은 이미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 말하곤 사라진다. 어느 날 실이 보여 따라가 보니 거기에 지렁이가 바늘이 꿰여 죽어 있었고 딸은 배가 불러와 아비에게 버림받는다. 딸은 혼자서 남의 집 밭을 매주며 아이를 기르고, 그 와중에 호랑이가 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주고 사라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 아이가 성장해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되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견훤

     견훤은 본래 남북국시대 신라의 장군으로 신라 서남 해안에서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배치되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거병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고, 왕을 칭했는데 이때 공식적인 건국은 아니었다. 일단은 왕이면서도 신라 왕의 신하를 자칭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다가 900년에 완산주에 도읍하여 200여년 전에 멸망한 백제의 부활을 선포했다. 이때 견훤이 재건한 백제를 먼저 있었던 부여씨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후백제로 부른다.

     신라, 궁예, 왕건 등과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수십 년간 다투었으나 935년 적장자인 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집정을 하던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실권한 견훤은 금산사에 연금되었다가 견훤은 신검이 처형되지 않고 용서받자 울분을 참지 못해 등창이 나 수일만인 황산(黃山)의 절에서 사망하였다.

 

자수성가형 왕 견훤

    그는 황간 견씨(黃澗甄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들인 신검, 양검, 용검, 금강 또한 성씨가 이씨가 아닌 견씨로 진씨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견훤의 피가 흐르는 가문은 황간 견씨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슬하의 딸들과 결혼한 사위들, 그들 가문이 번창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통혼한 집안들을 통해서 혈손들이 이어지고 있다. 견훤은 아주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아버지 아자개가 호족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말단 군인으로 시작해 불과 몇 년만에 중앙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아 장군의 자리에 올랐으며, 사실 지방에서 세력을 일으키게 된 계기도 서남해로 발령받아 그 곳에서 스스로 병사를 모으고 힘을 길러 해적과 해상 호족들을 진압하면서부터였으니 그야말로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독선적인 면이 강했다고도 한다. 그 결과, 탄생비화가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는 끈질긴 근성과 체력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67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왕건의 군사와 여러번 전투를 벌였고 수차례 승리한 적도 있었다. 대야성을 이십여년간이나 끈질기게 공을 들인 끝에 점령하였고, 나주를 다시 빼앗았으며, 그 여세를 몰아 개경까지 진격하여 고려 왕궁을 공격했을 정도로 전투에 능했고 백성들의 신뢰가 대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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