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의 희랑대사의 이야기
통일신라시대의 희랑대사의 이야기
희랑대사의 계보와 신통력
고려 시대의 문헌인 《균여전》(均如傳)에 따르면 후삼국시대 희랑댜사는 당시 해인사에서 주석하고 있었으며, 왕건을 지지하는 북악파의 중심 인물로알려져 있다. 불교계에서는 의사아대사의 작계로 보고 있다. 열거하자면 신라 화엄종 전법의 계보가 의상→법융(法融)→신림(神琳)→결언(決言)→희랑(希朗)→의순(義順)을 거쳐 균여로 이어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가야산해인사고적기》에 따르면 신라 말기 왕건이 후백제의 왕자인 월광과 전투하게 되었을 때 미숭산에서 농성하고 있던 월광을 상대하기 어렵게 되자 해인사로 와서 희랑에게 월광을 제압할 방법을 청했고, 희랑이 용적대군야차왕을 보내어 월광이 이를 보고 두려워 항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희랑대사의 신통력으로 적을 물리치자 왕건은 감사의 뜻으로 전답 오백 결을 하사하였고, 희랑대사는 이 돈으로 해인사를 중수하였다.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해인사에 있는 건칠희랑대사좌상은 건칠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목조 조각상으로, 통일신라 말에서부터 고려 초까지 활동한 승려인 희랑대사를 묘사했다. 불상의 모델이 된 희랑대사(希朗大師)는 생몰연대나 자세한 행적이 전해지진 않는다. 다만 고려 초기의 승려인 균여의 행적을 다룬 일대기인 균여전에 희랑도 언급된다. 통일신라 말기에 들어 화엄종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으로 나뉘었는데 북악의 지도자가 바로 희랑이었다고 전한다.
일반적인 불상들과는 달리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당대에 활동했던 실존 인물을 묘사한 불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 인물을 소재로 만든 불상을 조사상(祖師像) 혹은 진영상(眞影像)이라고 부르는데, 중국과 일본에서는 조사상을 만든 사례가 많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도 상당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조사상의 사례가 거의 없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그나마도 모델이 된 인물의 사후 오랜 기간이 지나고 만든 게 대부분이다. 작품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것은 오직 해인사의 희랑대사상만이 유일하다.
건칠희랑대사좌상의 특이점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높이 82cm의 건칠 및 목제 불상이다. 전면의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은 건칠기법으로 만들었고 후면인 등과 바닥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각 부위를 나누어 만든 뒤에 전체를 이어서 조립한 것이다. 희랑대사상의 형태는 마른 노승이 단정하게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인데, 전체적으로 대단히 사실적이다. 머리 부분은 일반적인 노승의 모습으로, 삭발을 한 머리와 이마와 얼굴 곳곳에 잡혀 있는 깊은 주름, 다소 큰 귀, 얇은 입술로 짓는 미소 그리고 도드라진 광대뼈까지 묘사가 되어서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라 실제 희랑대사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으리라 추정된다.
체구는 전체적으로 말랐는데, 푹 꺼져 있는 가슴팍을 보면 다소 수척해 보일 정도다. 또한 희랑대사의 가슴팍에 뚫려 있는 구멍이 특히 인상적인데, 이는 흉혈(胸穴)이라 한다. 흉혈에 대해 해인사에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희랑대사가 모기에 시달리는 다른 스님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 자신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이라 하는데, 사실 고승의 신통력을 상징하기 위해 흉혈이 일반적으로 쓰인다고 한다.
통상 스님들은 하안거라는 수행기간 동안에는 그야말로 용맹정진하는 여름철 단체훈련 같은 과정을 거친다. 하안거는 여름 석 달을 산문 출입을 삼가며 스님들이 힘써 정진하게 되고 오직 화두타파의 일념으로 한여름의 더위를 이기려고 애쓰는 동안 모기들이 스님들을 괴롭힌다. 바로 그때 희랑대사는 신통력으로 자신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을 자신에게로 다 모이게하고 다른 스님들이 용맹전정진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희랑대사가 모기들에게 집중적으로 피를 내어주는 장면은 가히 부처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