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 고선지 장군
고구려인 고선지 장군
장군의 배경이야기
고선지는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이다. 고사계는 고구려가 망하자 당으로 간 장군이다. 그의 아들인 고선지는 당나라의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를 지냈다. 그래서 그를 하서 혹은 안서 출신의 고구려 후예라고 불린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라 하였다. ≪신당서≫ 권135에는 그의 용모가 말쑥하고 수려하여 무장답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사계는 그가 유완(儒緩)한 것에 대해 늘 근심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 영민하고 도량이 넓으며 용감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고 한다.
당에서 출세하는 고선지 장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원정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즉, 747년 토번(吐蕃)과 사라센 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발탁된다. 토번족 정벌이라는 임무를 띤 그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오식닉국(五識匿國)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이름난 힌두쿠시 준령을 넘고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점령한 후,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간의 제휴를 단절시켰다.
사라센 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하여 홍려경어사중승(鴻臚卿御史中丞)에 올랐으며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 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하였다. 이 공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그러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석국왕을 참살하자, 이에 분기한 서역 각국과 사라센은 이듬 해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怛羅斯, 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 왔다. 이를 막기 위하여 고선지는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 원정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葛邏祿, Karluk)가 배후에서 공격하자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제2차 탈라스 원정에서 돌아오자, 당나라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하였다. 755년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이 해 11월 안록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출전하였다. 반란군이 동관으로 쳐들어 오자 본래 방어 지역인 협현(狹縣)을 무단으로 떠나 동관(潼關)으로 이동했는데,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던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이 사실을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느(Chavannes, Ed.)가 종래의 중국 문헌 이외에 새로이 서방·아랍 등의 문헌을 섭렵한 후 고선지가 세운 탁월한 사적을 발굴해내어 밝힌바 고선지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평가하였다. 또한 세계 최초로 섬유질의 제지법이 고선지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사실이다.
흑치상지 대장군과 고선지 대장군
백제출신 흑치상지장군과 고구려 유민출신인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에서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 명장들이다. 이 두 사람은 당나라에서 엄청난 공을 세우는데 공교롭게도 티베트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라는 해동사람이라는 점도 같다 마지막으로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처형된 것도 같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이민족 출신의 장군들은 대개 처형당했다, 페르시아 출신인 안녹산 역시 평로/범양/하동 세 곳의 절도사 자리를 확보한 안녹산은 이제 당나라 전체 군세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최대 군벌로 자리잡았지만 당군에 쪽기는 와중에 아들에게 살해당한다. 고선지 역시 안록산의 서진을 저지했으나 부관인 변영성의 모함으로 참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