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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연(無爲自然)> 노자는 누구에게 이 가르침을 주려고 했을까?

교육

by 북스톰 2023. 12. 24.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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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연(無爲自然)> 노자는 누구에게 이 가르침을 주려고 했을까?

 

무위자연(無爲自然)은 권력자들에게 주는 충고

    도가 사상의 요체인 도덕경의 사상은 서로 싸우는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의 논리를 펴나간 것이라면 유가사상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중심으로 상쟁대립에서 현명한 선택을 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도가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 탐구의 대상뿐만 아니라, 일반백성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주는 수양서로서도 역할을 했고, 신선사상이나 오두미교와 같은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은 무척이나 심오하다. 그 내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은 깊은 한문 공부나 철학적 사유를 하는 학자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을 이해하기 난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훈은 시켜 학자. 한문이 능통한 위정자들이 읽을 수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위정자들에게 일반백성을 시켜서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는 내용과, 이미 권력자들인 그들에게 더 이상의 권력과 재산을 더 가지려고 인위적으로 그리고 무리하게 애를 쓰지 말라는 내용으로 해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도덕경은 피지배계급인 백성들에게 주는 글이 아니라, 권력자들에게 주는 글인 것이다. 물론 여러해석이 가능한 처세술도 역시 권력층에게 해당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되는가.

    기원전 6세기경 중국 춘추시대의 대 사상가이자 제자백가 중 가장 앞선 철학자로서 숭앙받는 노자는 사마천의의 사기(史記)도 성이 이씨라고 나온다. 그리고 본명이 이이(李耳)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후 선천태후의 뱃속에서 70년을 태아로 있다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옆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를 나의 성씨로 하라고 요구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가 태어나면서 천상천하 유아일존이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결국 그의 성()이 오얏나무 ''가 되고, 이후에 성장하면서 귀가 컸기 때문에 이름은 귀 이()자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설화집인 태평광기에 따르면 본명은 이중의(李重耳)라고 전해진다.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바탕으로 도(道)의 사상을 남겼으나 그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지에 대해서조차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진나라때 함곡관은 진의 효왕 당시 만들어졌다. 이 난공불락의 관문을 지나가던 老子가 이때 만난 함곡관의 관문지기 윤희(尹喜)의 청으로 남긴 것이 총 5,000, 81장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도덕경이라고 한다.   유랑의 길을 떠나며 즉석에서 써준 쓴 심오한 지혜와 신비한 영감의 원천인 노자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다. 무위(無爲)의 는 언제나 無爲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의 무위이고, 自然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道法自然)’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도덕경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무위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놀고 먹으라는 것인가?

    무위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교와 도교의 차이점을 구분하는데에서 출발하면 용이할 수 있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노자에게 도를 묻고 그 가르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새가 잘 날아 다닌다는 것을 나는 알고, 고기가 잘 헤엄치는 줄 알며, 짐승이 잘 달리는 줄 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줄로 잡을 수 있으며, 날아다니는 것은 화살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에 이르러서는 나는 능히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과 같았다.-

    공자가 노자의 도사상을 듣고는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들의 집합체이므로 도덕경에서는 언어에 대한 부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교에서는 인위적 설정이 강조되는 예학(禮學)이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언어에 의한 규정이 강력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반면, 도교에서는 규정성의 파기와 언어에 대한 부정을 강조한다.

    노자는 책 읽고 공부한 사람들나 속칭 현자(賢者)나 지자(智者)라는 인간들을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인위적인 행동을 하려는 자로 간주한다. 그들과 다르게 자연스러운 도를 거스르지 않는 방법은 백성이 무지하고(無知) 바라는 게 없는 것(無欲), 즉 무위(無爲)라 규정하다. 여기서 무지(無知)는 글자 그대로 무식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굳지 풀어 말하면 인위적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노자의 무위의 개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하여 판단할 기준을 두지 않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무위는 놀고 먹으라는 말이 아니고 바보 같은 비교질을 하는 짓을 인위적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은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와 늘 비교하고 괴로워하며 그 비교가 만들어낸 고통의 그늘 속에 평생을 사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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