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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역사는 사마천의 《사기》 〈유후세가〉에 기록된 인물로, 장량과 더불어 진시황을 척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로서 예맥족 출신이 아닌가 사료된다. 장량은 백이십근 무게의 철퇴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엄청난 괴력의 역사(力士)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회양(淮陽)에서 동쪽으로 가 창해군이란 인물을 만났으며 창해군에게서 그를 소개받았다. 장량은 시황제가 이동중에 그가 철추로 시황제가 탄 수레마차를 박살내는 걸 확인했다. 창해역사는 도주에 성공했지만 추적하던 관병들에게서 그 수레가 저격을 대비한 빈 수레였음을 듣게 되었고, 결국 소득 없이 하비성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러한 창해역사의 사기에 실린 이야기가 진나라의 주변부에 살던 부여, 옥저나 예맥족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리라.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던 소위 세계최강자는 단연 진나라 황제 시황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창해역사가 괴력으로 진시왕을 죽이려 했다는 용기와 무공 등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전설이 탄생을지도 모른다.
창해역사는 역사상으로는 기록이 단 한 줄 나올 뿐인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게다가 창해라는 지명은 진나라에는 없는 군이다. 사기집해에서는 창해군을 동이족의 군장으로 추측하였고, 당나라 시대의 인물 사마정이 집필한 '사기색은'은 한나라 때 동이의 예군(君) 남려가 투항하자,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을 근거로 해서 유사한 지역일 것이라고 추측해서 예맥계 이민족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 무제 시절 예나라 백성 이십팔만명이 고조선을 버리고 한나라에 투항하자 무제는 그들을 위해 창해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사기의 동이열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량이 만났다던 창해군이 진(秦)나라의 현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남쪽의 이민족 제오(諸奧)의 군장으로서 월나라가 초나라에게 멸망하자 월왕 무강(無彊)의 아들이 독립하여 스스로를 창해군(倉海君)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사람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 설화에 나오는 창해역사는 우리민족일 가능성에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학자 홍만종이 쓴 순오지에 의하면 예국의 노파가 시냇가에서 호박만한 알이 떠내려 오는 것을 주워 두었더니, 얼마 안 되어 알이 두 쪽 나며 남자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 얼굴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며, 6세가 되자 키가 8척이나 되고 얼굴빛이 검어서 성인과 같았으므로 검을 ‘여(黎)’자를 성으로 삼고 이름은 용사(勇士)라 불렀다. 여용사가 예국의 호랑이를 퇴치하기도 하고, 만 근이나 되는 종을 옮기는 등 괴력을 발휘하자 왕은 상객으로 대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곳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필자인 홍만종은 여러 기록을 예로 들면서 예국이 예전에 강릉에 있었으며, 진한시대부터 중국과 상통하였고, 오대산에 창해군이라는 옛터가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확실히 믿음직한 말이라고 언급하면서, 창해 역사는 한국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강릉에 있던 예국은 실직곡국, 파조국과 함께 창해삼국이라 불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천년 전에 창해 역사가 진시황제 저격에 사용했다고 알려진 철퇴도 사진과 기록으로 남아있다. 황성신문 1909년 10월 27일자 기사는 영국의 허버트 키치너 육군 원수가 한국으로 와서 궁내부 박물관에 들렀다가 창해역사의 철추를 잠시 빌려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며칠 뒤인 11월 2일에는 키치너 원수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실려 있다. 이 철추에 대한 행방은 동아일보 1929년 11월 7일에 등장한다. 동아일보 기사는 대한민보를 다시 기록하면서 키치너 원수가 철추를 보고 돌려주었는데, 어제는 일본군 사령부가 보겠다고 가져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히 이 녹이 전혀 슬지 않은 철퇴가 진시황 암살에 사용된 철퇴일리는 없다. 일단 시황제에게 날아간 철퇴가 돌고 돌아 이천년후에 한반도까지 오는 게 불가능하고 설사 그게 가능했다 하더라도 이런 엄청난 유물이 2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번도 사서에 기록된 적이 없었던 걸로 보아선 대한제국 후기에 만들어진 모조품일 것이다. 하지만 전국대부분의 지역에서 창해역사의 이름이 나타나고 평창과 강릉지역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창해역사의 진시황제 암살사건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나 우월성 같은 걸 보여주고 싶은 민족적 갈망이 묻어나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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