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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죽는 사람>은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작품이다. 작가 조해일은 이 작품 이후로 비슷한 작품세계로서의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맨뜨롱따또>에서는 거대한 체구의 김관호의 병영생활과 그의 죽음 통해 약함과 강함, 어리석음과 약삭빠름, 희극과 비극의 대비를 형상화한다. 잘못된 선입견과 처참한 죽음, 이를 통한 진실의 확인은 세상이 숨어있는 사실들에 대한 절실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을 드러낸다.
초기 조해일의 소설은 일견 보잘 것 없고 사소한 인간에게 카메라의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그런 부류의 인물들은 변두리 인생이거나 사회로부터 소외되었고 자질구레한 시련의 반복 속에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삶 자체를 포기하거나 완전한 좌절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길을 막아서는 작은 어려움들은 그들에게 우연히 찾아오거나 매순간 깨닫는 작음 기쁨과 깊지는 않아도 필요성에 의해 일어나는 단상들에 의해 곧잘 극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나 대부분의 독자에게 있어서 일상의 작음 기쁨이나 위안 혹은 사소한 부분에 대한 통찰은 때때로 가장 중요한 삶의 부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매일 죽는 사람>의 캐릭터 역시 소외된 개체로서의 소시민이다. 작중 프로타고니스트 그는 인맥사회인 이 땅에서 전혀 사회적인 연결 고리가 없는 위인이다. 재산이나 배경이 없는 그는 충무로 영화판에서 엑스트라를 해서 연명을 하고 있다.
가난한 관리였던 그의 부친이 과로로 쓰러지고 얼마간의 와병 후 유산이라곤 전혀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대학의 문과 신입생이었다. 입학 후 이년 동안 등록금을 구하느라고 가정교사 등의 일로 대학 생활을 속절없이 소비한 그는 더욱 어려움 지경에 처한다.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에서 수술비를 조달하지 못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그는 대학을 그만두고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과거 가정교사를 하던 집에 찾아갔다가 우연히 만난 옛제자와 반대하는 결혼을 한 후 취업이 안돼서 고생하고, 노동판에서 다쳐 늑막염을 앓고 난 뒤 겨우겨우 얻는 일이 충무로 바닥에서 엑스트라역을 하는 것이었다. 하루 삼백원 수입, 그것도 촬영이 없으면 그야말로 공치는 일이었다. 가까스로 연명하는 그와 그의 처에게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어느 정도 성취되고 삶에 대한 만족이 이루어지면 행복을 느끼고 삶의 보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인류 모두가 만족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상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할 만큼 채우며 살지 못한다. 욕망이 좌절되고 일상의 전망이 불투명할 때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고통이 되고 사람들은 삶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허무감을 느끼고, 어려운 삶이 가져오는 끊임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수단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작중에서 그는 매일 죽는 역할이나 하는 엑스트라여서 그런지 죽음에 더욱 민감했고 촬영 중 죽는 역할을 하다가 마치 실제로 죽은 것처럼 의식이 되돌아오지 않는 경험을 한 후 그는 살아가면서 섬뜩하게도 죽음의 그림자와 만나는 착각에 빠져 살게 된다. 그리고 가난이라는 삶의 애환 속에 그는 죽음의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아내의 태중에 있는 태아를 죽음의 싹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라는 전제 하에 인간의 삶은 허무하고 고통스럽게만 인식된다면 삶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당연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본능적으로 활기차게 혹은 욕망을 불태우며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결국 모두 다 죽는다 해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죽기까지는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그 허무와 고통을 견디는 것일까? 이러한 절대적인 질문에 대한 답 중 하나가 바로 조해일의 <매일 죽는 사람>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삶의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가난의 고통과 욕망의 좌절, 죽음의 허무감 등은 그것을 겪고 인식하는 사람의 문제이다. 가령 욕심이 크면 클수록 고통도 큰 법이다. 삶에의 고통은 한편 뒤집어보거나 입장을 달리하면 더 큰 고통에 비해 삶의 즐거움일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고통 없는 즐거움은 비교해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맨발로 아스팔트를 걸어가는 아픔과 구두를 신고 아프지 않게 걸어가는 통증의 차이가 바로 행복과 고통의 차이인 것이다. <매일 죽는 사람>의 주인공은 그러한 대비를 통하여 한발에는 구두를 신고 다른 한발에는 구두를 벗고 거리를 걸어가면서 그 고통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고통이 동시에 위안이 되는 것은 소설 자체의 아이러니함에서 오는 역설적 입장이다. 텍스트에서 매일 죽는다는 것은 매일 되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되살아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간 순간 마주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일상에서 만나는 작음 기쁨들, 가령 태어날 아기, 아내의 존재, 단역의 추가로 얻은 작은 돈, 쇠고기와 같은 별식, 구두끈을 정성들여 잡아매는 그의 사는 방식을 그러한 위안의 생각들은 그를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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