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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러비>라는 단편소설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이 작품으로 한 줄로 요약한다면, 사춘기 소년의 절망과 깨달음일 것이다. 소년은 소녀와 함께 바자에 가고 싶다. 그는 연인들이 함께 길을 거닐고, 대화하며 식사하기도 하는 그런 데이트를 꿈꾸었다. 하지만 동행은 무산된다. 친구의 누나인 소녀가 다니는 수도원 학교에서 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런 소녀에게 바자에 가서 뭐라도 사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는 아랍 바자에 가서 소녀에게 어울릴 물건을 사다주며 호감을 쌓으려는 완벽한 계획을 도모한다. 소년은 바자가 열리는 날까지 하루하루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나 소년에 계획에 장애물들이 등장한다. 결국 거의 다 끝나가는 바자에 도착한 소년은 결국 번민과 분노로 불타오르게 된다. 소년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다 꺼져가는 불빛과 남아있는 몇몇 상점들, 그리고 귀찮은 듯이 구는 직원 과 싸우는 장사아치 부부들 뿐이다. 그렇게 소년은 깨져버린 환상 속에서 무엇을 살 것인지조차 결정하지 못한 채 마비가 된다. 그는 그 순간 현실을 깨달아버린다. 이른바 에피퍼니(epiphany)가 나타난 것이다.
이 작품에는 당시의 생활을 보여주는 자전적 투영이 반영됐다. 조이스가 창조한 형식인 에피파니는 말이나 몸짓의 통속성 속에 또는 마음 자체의 기억할 만한 단계에서, 한 가지 갑작스러운 정신적 계시를 뜻한다. 에피파니는 원래 공현대축일을 이르는 말로서 기독교에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러 베들레헴을 찾은 것을 기리는 축일을 의미했다. 그래서 원래 신의 현현을 의미하는 종교적 용어로서 구유에 누운 아기예수가 동방박사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말했다. 그런데 예술가를 상상력의 사제로 본 조이스는 그것을 예술적 용어로 옮겨쓴 것이다.
조이스가 말하는 에피퍼니는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종교적 입장과 공통되며 단지 그 내용이 신의 현현이 아니라 어떤 사물의 본질 또는 의미가 드러나는 점에서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에피퍼니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얻어진 개개의 독특한 것으로 이것이 소설에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얻게 되는 힘이다. 조이스는 에피퍼니를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둔다. 의식의 흐름의 기록과 같은 개념으로 외부세계의 자극에 대한 인물의 정서적, 지적 반응 및 이해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인식적인 측면보다 지각적인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통상 인식은 인간 지식의 총체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그것을 초점화하면 일정 범위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뜻한다. 인식의 토대와 출발점은 어떤 신비한 충동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실천과 실천적 욕구이다. 특히 생산과 관련된 실천 및 욕구가 인식의 발전 방향을 규정하며, 인식의 중요한 과제들도 실천에서 나온다. 반면 지각은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사물이나 자극을 의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통상 소설을 읽으면 작중 주인공이 세상을 지식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세계와의 갈등과 자극을 통해 서사를 이끌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물은 그 상황 속에서 갈등과 자극 끝에 특별한 인식에 다다랄 수 있다. 그것이 소설의 에피퍼니가 주제를 현현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소설가가 소설에서 빛나는 순간인 깨달음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인물이 혼란과 갈등 속에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맞선 타인이나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구별되고 그 구조적 통일성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조직되었을 때 그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는 빛나는 깨달음의 순간이 성취되는데 이것이 곧 에피퍼니라는 것이다.
예술의 한 형식인 소설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단순한 차원에서부터 아이러니컬한 톤을 유지한다. 그런데 작중 인물이 아니러니컬한 구조로 인하여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장면에서 독자는 전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후면 영역에서의 다른 행위도 감지하지만 소설 캐릭터는 그 순간 깨닫는 것이다. 이 순간에 앞의 사건들을 총괄하는 깊은 이해를 동반하면서 상황 전체는 순식간에 번개가 치듯이 강렬하게 드러난다. 그런 라이트닝 같은 깨달음은 인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순간의 지각적인 것이다. 이런 구성의 연습은 예비작가들에게는 플롯을 짜는 멋진 창작 연습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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