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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2대 지철로왕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조에 따르면 내물왕의 증손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고 소지왕(炤知王)의 재종 동생이었다.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전왕인 소지마립간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왕위를 이어 받았다. 왕에 즉위할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고 한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라 하였다. 437년에 태어난 지증왕은 신라의 제2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다. 78세로 승하한 지증왕은 즉위 당시 64새의 고령이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왕의 음경이 무척 컸다는 의미로 지대(至大)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지철로라는 이름은 설화에서는 음경이 크다고 했지만 결국 크고 세다라는 뜻에서 지철이라는 철의 의미로 변했을 수도 있다. 좌우간 기록대로라면 1.5척의 길이를 자랑하는 왕의 음경은 오늘날 도량형으로 보면 45.5cm나 되는 것이다. 왕의 음경(陰莖)이 너무 커서 적당하고 훌륭한 배필을 구하기가 어려워 사신을 삼도(三道)에 보내 배필을 구하였다. 왕의 물건을 본 여자들은 모두들 무서워했고 아무도 겁이 나서 시집가려 하지 않으니 베필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음경을 소유한 왕을 상대할 수 있는 여성은 그에 걸맞는 체구와 능력이 있어야 만했다. 당시에는 성골에 걸맞는 고귀한 여성 중에서 배필을 찾는다는 것은 성골의 신성성의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둘째로 신라의 모든 남성들은 왕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일단 남성성으로 다른 남자들을 압도하기 때문에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신체 일부가 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남자로서의 자존심 혹은 능력치 같은 것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일부 여성들도 그것을 흠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스토리텔링 속에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늙은 왕의 재혼을 긍정적으로 위장하기 위한 음모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셋째로는 64세에 즉위한 왕의 남성적 능력이 강하다는 말은 노쇄한 왕의 통치 능력을 의심하고 무시하는 반대 세력들에게는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큰 음경 스토리는 긍정적으로 먹힌 것 같다.
왕의 특명을 받고 기골이 장대한 성골 처녀를 찾아 떠난 신하가 경주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牟梁部)에 이르렀다. 마을 보호수인 동로수(冬老樹) 아래에서 파견된 신하가 개 두 마리가 커다란 똥 한 덩어리를 양쪽에서 물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떤 소녀가 고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모량부 박씨 이찬 등흔(登欣) 즉 상공(相公)의 딸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은밀히 숲속에 눈 것이라고 하였다. 그 집을 찾아 그녀를 보니 신장이 7척 5촌이나 되었다. 이 사실을 왕께 갖추어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 그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 들여 황후로 삼았고, 군신들은 모두 경하했다.
그런데 육십대에 새 왕비를 찾는 다는 것은 현재의 부인은 정식 부인들은 후처들이라고 볼 수 있다. 혹은 조강지처는 상처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왕비의 똥을 두 마리 개가 물고 싸우는 비유는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세력이 물고 다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왕비를 둘러싼 여성들과 그 관계가 있는 세력들의 다툼을 조롱하면서 당시 상황을 일연스님이 상징적으로 서술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성골인 이찬 박등흔 상공(相公)의 딸이 낙점되었고 그것은 이미 정해놓고 외부로 알리는 일종의 쇼였을 지도 모른다. 이찬의 딸이 왕비가 되는 조건으로 신장이 7척 5촌이나 되었고 성골이었다. 그 정도의 스펙이어야 다른 후비들의 기를 누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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