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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옥대(天賜玉帶)는 한마디로 하늘에서 내려준 허리 벨트이다. 천사옥대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원년(579)에 천사(天使)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주었다는 옥대(玉帶)로,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과 함께 신라 3보로 일컬어진다. 하늘로부터 왕의 권위를 인정받는 왕권의 상징으로 보여진다.
천사옥대(天賜玉帶)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원년(579)에 천사(天使)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주었다는 옥대(玉帶)로,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과 함께 신라 3보로 일컬어진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5년(921)에 의하면 “성대(聖帶)”, “보대(寶帶)”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조에는 진평왕이 즉위한 원년(579)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옥대를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친히 꿇어 앉아서 받으니 그 후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 띠를 사용하였다.”라는 설화가 전한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권2 고적 옥대조에도 천사옥대조와 같이 유사한 기록이 전해지며 『삼국유사』에서 “상황(上皇)”, “천사(天使)”라고 표현된 것이 “상제(上帝)”, “신인(神人)”이라고 기록된 것 이외에는 차이가 없다. 이렇게 진평왕은 즉위한 해에 하늘에서 인정한 왕이 되었다. 진흥왕(眞興王) 대 이후 행해졌던 왕권강화의 마무리되던 단계로 신라 왕실은 왕의 권위를 가시적(可視的)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천사옥대를 내려준 하늘의 왕은 기록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상황(上皇), 상제(上帝)를 제석(帝釋)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신라 중고기에 진평왕의 국정(國政)에 대한 자신감이 표출된 것은 바로 제석신앙(帝釋信仰)의 수용이었다. 진평왕이 마지막 남성 성골(聖骨)로서 다른 왕족들과 차별을 두게 되면서, 새로운 천(天)의 관념으로 제석을 등장시키게 되었을 것이다, 제석(帝釋)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욕계(欲界)로 일컬어지는 세계의 두 번째 천으로 지거천(地居天)의 수미산(須彌山)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여 도리천(忉利天)을 다스린다. 제석이 거느리는 도리천은 욕계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지상의 맨꼭대기인 수미산 봉우리에 있는 천상의 장엄세계로 연결되어 관념적으로 다른 제천(諸天)들보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쉬운 신이었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권속들을 이끌고 불법을 수호하는 제석의 관념은 석가모니 왕실을 그대로 재현한 신라 왕실에서 차용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왕실은 제석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진평왕 자신도 제석의 호위를 받는 부처와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진평왕은 하늘이 내려준 옥대를 착용함으로써 절대권을 과시하려 했을 것이다.
진평왕은 신라 제26대 왕이고,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54년을 재임한, 신라 천년 역사의 가장 오래 왕위를 지켰다.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이 진평왕에게 이르러 최고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평왕의 아버지는 개에 물려 죽었다. 진흥왕의 큰아들이요 이미 태자에 책봉된 동륜의 죽음은 진평왕의 나이 겨우 다섯 살 때였다. 동륜이 보명궁의 담을 넘다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것이다. 보명궁주는 진흥왕의 후궁, 아버지의 여자를 사랑한 불륜의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은 진평왕에게 두 가지 약점이 되었다. 불명예스럽게 죽은 아비의 자식이라는 점이다. 둘째로는 태자의 아들이기 때문에 곧바로 앙이계승 제일위이었지만 작은 아버지인 진지왕을 거쳐 왕위가 넘어온 것도 약점이었다. 선왕인 진지왕이 제거되고 열세살의 진평왕이 즉위하게 된 상황에서 왕권은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천사옥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지왕(眞智王)은 둘째아들로서 576년(진흥왕 37) 진흥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에 이찬(伊湌)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해 나랏일을 맡겼으며, 재위 4년 만에 죽었으며,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매장되었다.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데 진지왕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으며, 죽은 뒤에 애공사(哀公寺) 북쪽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진지왕이 죽은 뒤에 형인 동륜(銅輪)의 아들인 백정(白淨)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동륜의 죽음으로 왕이 된 그의 아우 진지왕은 행실이 밝지 못했다. 진평왕에게 삼촌이 되는 진지왕은 자리에 오른 지 4년 만에 폐위되고, 20대 후반의 아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진평왕으로서는 친부와 숙부가 모두 패륜적이고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 왕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다. 사실 진지왕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그는 김용춘인데 나중에 진평의 딸 천명공주와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았다. 그러나 왕위는 그에게 이어지지 않고 그는 강등되어 성골에서 진골이 되고 말았고 왕위는 진평왕에게 돌아왔다. 신라 왕가에서는 타락한 진지왕을 거부하고 음탕하다는 이유로 왕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진흥왕과 닮은 진평을 서둘러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 열세 살에 즉위하지만 할머니인 사도부인이 수렴청정을 했다. 그리고 정통성과 권력이 천사옥대라는 상징물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54년 동안 왕위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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