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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류왕과 연개소문 갈등에 대하여

소설공부

by 북스톰 2024. 3. 12.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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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류왕과 연개소문 갈등에 대하여

 

영류왕의 도교도입과 연개소문

     영류왕(榮留王)의 이름은 건무(建武)이다. 영양왕(嬰陽王)의 이복동생으로 영양왕 사후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년(618)에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함과 동시에, 새로 등장하는 당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당나라도 민심을 수습하고 돌궐(突厥)의 위협 때문에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우호적 관계 속에서 624년 당나라로부터 공식적 외교관계를 통해 도교(道敎)가 들어왔고, 다음해에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다.

     영류왕의 즉위 후 고구려에서 불교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는 영류왕이 즉위 이후 영양왕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기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세력을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도교를 들여와 후원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승 보덕(普德)의 백제 망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기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세력에 대한 견제는 보장왕(寶藏王) 즉위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영류왕의 도교 수입 및 진흥은 노자(老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모시고 있던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영류왕대의 온건한 대외정책 추진을 대외강경파였던 영양왕대의 신흥 귀족세력들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불교세력을 물리치고 도교세력을 중용하는 통치는 연개소문과도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연개소문의 등장과 영류왕 시해

     연개소문의 조부와 부친이 모두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막리지에 올랐던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대중을 현혹시켰다는 구절이 있다. 그의 아들인 남생(男生)의 묘지명에도 그의 집안이 연못()에서 나왔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물과 관련된 동북아시아의 고대 설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연개소문의 다른 아들인 남산(男産)의 묘지명에서는 그의 조상을 고구려 시조인 주몽과 연결시키고 있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생김새가 씩씩했고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그는 또한 의지가 강하고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의 자리인 막리지직을 이어받으려 하자 유력 귀족들이 연개소문의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며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귀족들의 견제에도 연개소문의 세력은 날로 강해졌다. 특히 642(영류왕 25)에 연개소문이 천리장성을 쌓는 최고 감독자가 된 이후 그를 두려워하던 대신들은 왕과 상의해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이를 알아차리고 역공을 폈다. 그는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모두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연개소문은 왕과 귀족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를 미리 알고 정변을 일으켜 왕당파 귀족을 다 죽인다. 그는 궁으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이고 왕의 동생인 장()을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이다. 이제 연개소문은 귀족회의가 지니고 있던 병권과 인사권을 모두 장악했다.

 

영류왕 사후 연개소문의 독재

     영류왕대에 막리지에 올라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은 구내와 안팍으로 상당한 고충을 겪게 된다. 당나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수군(隋軍) 격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을 파괴한다든지,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를 정탐하다가 전투가 벌어진다든지 하는 등의 양국간의 긴장관계는 점차 고조되어 나갔다. 또한 고구려도 당나라와의 대결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631년부터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수축하기 시작해 그 뒤 16년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당나라와 이같이 형식적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는 남으로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사투를 계속하였다. 629년 낭비성(娘臂城)을 빼앗기는가 하면, 638년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는 등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북방에 천리장성을 축조하자고 영류왕에게 건의한다. 그런데 영류왕은 당시 천리장성의 수축을 감독하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제거하려다가, 642년 오히려 그의 정변에 의해 몸이 토막 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류왕과 연개소문 간의 알력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과 막리지인의 연개소문과 대립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당온건론의 영류왕과 대당강경론자였던 연개소문과 마찰이 있었을 것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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