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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혹은 동명성왕의 성은 무엇인가?

소설공부

by 북스톰 2024. 3. 11.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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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혹은 동명성왕의 성은 무엇인가?

 

주몽의 성은 고씨인가, 해씨인가, 부여씨인가

      동명성왕은 속칭 주몽으로 알려진 고구려를 건국한 군주이다. 삼국사기와 고구려본기에는 국가의 시조가 동명성왕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고구려 태조 중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통상 주몽왕과 동명성왕을 동일시하지만 당대 기록인 702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東明)과 주몽을 별개 인물로 보고 있다.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 뜨는 곳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의 풍속을 제압하였다. 이처럼 당대 고구려 때까지는 동명과 주몽이 별개였으나, 삼국시대가 끝난 뒤 훗날 고려시대 이후 시점에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주몽왕이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추모왕이라고 불리는 주몽은 그의 성을 고씨로 정하였다. 부친인 해모수의 성을 따르면 해씨가 되어야 할 것이고 부여의 왕족이라면 부여씨를 쓸 수도 있었는데 그가 별안간 고씨라는 성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진정한 성은 무엇인가?

 

백제로 건너간 고구려의 왕조성씨

      당대의 정확힌 기록물 중 하나인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주몽을 일컬어 추모(鄒牟)로 쓰여 있으나 한자로 음차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추모는 주몽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중적인 주몽(朱蒙)이라는 이름도 추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유어인 동명성왕의 이름을 한자로 가차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당대 고구려인들이 작성한 금석문에서는 일관적으로 추모로 칭해지기 때문에 주몽이 아닌 추모라고 부르는 게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백제의 왕들은 모두 부여씨라는 성을 쓰고 있다. 복잡다단하고 혼란스러운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생부인지 계부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동명성왕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의 고구려 왕실의 성이 부여씨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런데 백제의 최상위층에는 해씨라는 일족이 존재한다. 그들은 왕족의 하나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고위직책을 역임했고 고씨도 존재했다. 그런데 부여씨가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동명성왕은 추모왕인가?

      동명성왕은 우리나라 고대사의 여러 왕들 중 사후에도 꾸준히 중요한 왕으로 대접을 받는 편이다.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 같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대 및 중세 국가들의 시조로 오랫동안 추앙받아 왔다. 조선은 국가의 시조로까지 보진 않았으나, 조선 시조 단군과 동격으로 제사를 지냈다. 동명성왕은 신궁(神弓)으로 불렸으며, 물레 위의 파리를 쏘아 잡았다거나 송양과 나라를 두고 재주를 겨룰 때 일백보 바깥의 옥가락지를 화살로 꿰었다는 등 관련 설화가 전해진다. 현대 한국에서도 명궁의 대명사로 통하고 그 신통한 재주 때문인지는 요즘도 몇몇 무속인들은 동명성왕을 자신들의 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고구려 후기로 갈수록 추모왕은 당연하게도 동명성왕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용되어 둘은 하나로 통일된 느낌이다. 그는 건국오아이기 때문에 당연히 민중들에 의해 숭배됐다. 중국의 역사서 북사에도 주몽 숭배 관련 기록이 있는데, 신묘가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해 부인상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신이라 하여 그들의 시조이며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모두 관사를 설치해 놓고 사람을 보내 수호하는데 대체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부씨와 고씨가 등장한다.

 

동명성왕의 일반화

     백제에는 동명왕의 아들 온조왕이 동명왕묘를 두어 제사지냈고, 국가적으로 동명성왕에 대한숭배 의식이 있었다. 복잡한 역사와 신화를 보면 고주몽이 온조의 생부인지 계부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적어도 근초고왕부터 시작되는 백제 왕가의 직접적 혈통적 선조가 고주몽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의 시조로서 동명왕에 대한 제사를 모신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고구려와 육백 년간 전쟁을 한 백제는 적대국인 고구려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부여와의 관계를 강조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주몽은 배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백제사에서 고주몽의 존재를 없애거나 격하시키기 위해서는 고주몽은 백제 건국왕의 계부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해야만 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근초고왕 계열이 확립한 온조계 전통성 전승을 수정하여 주몽이 백제 건국왕의 생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백제의 위덕왕인 부여창이 고구려 고씨 장수에게 서로 성씨가 같다고 하는 일화도 사실 백제의 부여씨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가 만들어낸 부여씨가 바로 고씨였다는 방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적어도 백제왕가 내부에서는 백제 왕가의 성씨가 고주몽의 고씨라고 알고 있었다는 개연성은 높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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