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행복한 죽음』과 장자 「지락(至樂)」편의 고분이가(鼓盆而歌) 비교

죽음을 받아들이는 유사점
이 글이 목적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동서양의 다른 점과 유사한 점을 비교, 대조하는 자리를 만들어 보고자 함에서 비롯되었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 속한 두 사상가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때 인간이 자유로워지는가 라는 문제를 전혀 다른 언어로 탐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두 작품 모두 죽음을 단순한 비극이나 삶의 종말로만 보지 않고, 죽음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곧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일견 전혀 다르고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행복해지는 인간이라는 카뮈의 입장과 죽음은 삶이 끝난다거나 반대가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자연의 변화로 받아들이면 지극한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일견 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겠다.

카뮈의 행복한 죽음과 장자 지락편의 죽음관 비교
알베르 카뮈의 『행복한 죽음』과 장자의 「지락」편은 제목부터 행복과 지락이라는 흥미로운 유사성을 지닌다. 카뮈의 작품에는 아예 행복한 죽음이라는 말이 들어 있고, 장자의 「지락」은 지극한 즐거움을 뜻한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말하는 행복과 즐거움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 죽음을 삶의 한계로 인정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다. 다만 두 사람의 결론은 동일하지 않다. 장자가 자연의 변화와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동양적 사유를 통해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카뮈는 신이나 초월적 의미가 보장되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를 직시하면서도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통해 죽음을 바라본다.
먼저 장자의 「지락」편에서 제시된 죽음은 삶의 멈춤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다. 장자의 아내가 죽자 친구 혜자가 조문을 온다. 그런데 혜자가 본 장자는 슬퍼하며 곡을 하는 대신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이를 본 혜자는 장자를 비난한다. 아내와 함께 살고 늙어왔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장례를 치러야 할 사람이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의 대답은 의외다. 장자 역시 아내가 처음 죽었을 때는 슬펐다고 말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내의 삶은 원래부터 자연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형체가 생기고, 생명이 생기고, 다시 죽음으로 변화한다. 즉 죽음은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여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생명 역시 하나의 변화이고 죽음도 또 하나의 변화다. 장자는 이를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에 비유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변한다고 해서 우리는 자연을 애도하지 않는다. 여름이 가을로 바뀐다고 해서 가을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죽음 역시 그러한 변화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죽은 아내가 천지라는 거대한 방에서 편안히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는 행위’는 죽음을 조롱하는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죽음을 자연의 변화로 이해했으므로 죽음에 지나치게 저항하지 않겠다는 철학적 선언이다. 다음으로 카뮈의 『행복한 죽음』 에서의 행복은 죽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소유에 있다하겠다. 주인공 메르소(Mersault)는 자신의 삶이 진정한 자기 것이 아니라는 감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이다. 메르소는 경제적 조건, 인간관계, 사회적 관습 등에 묶여 있는 삶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카뮈가 말하는 ‘행복한 죽음’은 죽음 자체가 행복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충분히 살아낸 인간에게 죽음이 더 이상 삶의 실패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점에서 『행복한 죽음』의 핵심은 죽음보다 삶의 주체성에 있다.
장자의 죽음과 카뮈의 죽음
두 사람의 차이를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우선 장자느 죽음도 자연의 변화라고 본다. 반면 카뮈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다. 장자는 생명과 죽음을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안에서 바라본다면 카뮈는 인간이 죽음 앞에서 경험하는 불안과 부조리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장자에게 죽음의 문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가깝고, 카뮈에게 죽음의 문제는 개인과 자신의 존재 사이의 관계에 가깝다. 그런데 두 사람은 죽음을 통해 삶을 발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자는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삶을 자연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바라본다. 카뮈 역시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할수록 현재의 삶을 더욱 강렬하게 바라본다. 즉 두 사람에게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단순한 종착지가 아니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한다. 이것이 두 사상의 가장 깊은 접점인 것이다.
장자의 죽음과 카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 비교
장자에게 있어서 죽음의 수용은 자연과의 화해이다. 장자의 사상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태어남도 자연의 변화이고 죽음도 자연의 변화다. 따라서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자연 전체와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장자는 그 분리를 해체한다. 나의 삶과 자연의 변화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자연의 흐름 속에 다시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에게서 죽음이 지락으로 연결되는 논리다. 그런데 카뮈에게 있어 죽음의 수용은 부조리와의 대면이다. 카뮈는 장자처럼 자연의 순환 속에서 죽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게 인간은 의미를 요구하는 존재다. 여기서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absurd)가 발생한다. 인간은 의미를 원하지만 세계는 침묵한다. 그렇다고 카뮈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의미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더욱 강렬하게 살아야 한다. 따라서 카뮈에게 죽음의 수용은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소유하는 방법이다.
나의 생각
장자의 고분이가와 카뮈의 행복한 죽음을 여기서 비교, 대조하는 이유는 둘 사이의 관계성 때문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죽음 앞에서 일반적인 사회 규범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울고 곡해야 한다는 관습을 거부한다. 카뮈의 인물 역시 죽음을 대하는 사회적·종교적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둘 모두 죽음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해체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작품은 죽음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추리로도 읽을 수 있다. 추리의 단초는 먼저 죽음의 문제이다. 첫째로 죽음은 정말 불행인가의 문제에서 장자는 죽음은 자연의 변화일 뿐이라고 보고, 카뮈는 죽음은 피할 수 없으며,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오히려 삶의 현재가 선명해진다고 본다. 결국 두 사람의 인식은 유사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 결론은 죽음의 의미를 바꾸면 삶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고 해서 완전하게 그 인식을 자기 삶의 강철같은 신념과 믿음으로 삼아 삶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이 지점에서 장자와 카뮈의 위대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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