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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부조리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나.

소설공부

by 북스톰 2026. 9. 2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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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부조리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나.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와의 충돌

카뮈의 사상을 따라가면,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는 체념도 아니고 허무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의미가 보장되지 않는 세계에서 스스로 살아갈 이유와 행동의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카뮈에게 있어서 부조리란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단순한 명제로 요약되는 것이 아니다. 카뮈에게 부조리(absurde)는 세계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부조리는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조리는 인간이 의미와 합리성을 기대하는 세계에서,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근본적 불일치를 뜻한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본질적 관념이자 제1의 진리라고 설명했다. 장폴 사르트르가 소설 《구토》에서 사물 그 자체의 우연성과 무의미성을 직시할 때 느끼는 불안을 부조리로 본 것과는 약간 다르다. 인간은 세계에 묻는다. 나는 왜 사는가? 죽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선하게 살면 선한 결과가 돌아오는가? 고통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가? 그러나 세계는 결정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질문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이 간극이 부조리다. 따라서 부조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의미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결국 인간은 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리고 인간은 세계가 내가 원하는 최종적인 의미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은 어떤 삶을 살게되는가.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 태도

카뮈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부조리를 발견한 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어떤 절대적 의미로 도피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가 문제 삼는 것은 자살이다. 삶에 궁극적 의미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해서 삶 자체를 포기한다면, 부조리를 끝까지 경험하기 전에 문제를 제거해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말하는 첫 번째 태도는 오히려 끝까지 살아보는 것이다. 세계가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살아간다.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을 살아간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에 대한 반항(révolte)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 태도는 거짓된 희망으로 부조리를 덮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희망이 없어야 한다는 말보다는 확실하지 않은 미래의 구원을 현재의 삶보다 우위에 놓지 않는 것이다. 카뮈는 현재의 부조리를 미래의 의미로 쉽게 봉합하는 것을 경계한다.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은 오히려 자신은 답을 알지 못하고, 답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된다. 이것이 바로 카뮈적인 정직성이다.

그다음의 태도는 세상에 반항하는 것이다. 카뮈의 핵심 개념인 반항은 단순한 정치적 반대나 폭력적 저항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파괴하는 부조리와 죽음에 맞서 그래도 나는 살아가겠다라고 말하는 태도다. 『시지프 신화』의 시지프가 대표적이다. 시지프는 산 정상까지 돌을 밀어 올리지만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에게는 최종적인 성공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돌을 밀어 올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돌을 정상에 영원히 올려놓는 ‘성공’이 아니다.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인간의 의식이다. 그래서 카뮈에게 시지프는 패배자가 아니라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주어진 삶을 최대한 충만하게 경험하는 태도도 중요하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에는 ‘살아 있음’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 있다. 죽음이 피할 수 없고 세계가 궁극적인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중요해진다. 태양을 느끼고, 바다를 보고,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고, 여행하며 육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거대한 우주적 진리와 같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경험들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영원한 의미’가 아니라 ‘현재의 경험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은 삶을 축소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감각을 확대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방인』의 뫼르소의 경우

『이방인』의 마지막에 이르면 뫼르소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 그는 세계가 인간의 기대에 맞춰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갑자기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더욱 선명하게 의식하게 된다. 따라서 뫼르소에게서 볼 수 있는 카뮈적 태도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므로 아무렇게나 살겠다가 아니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거짓말로 덮지 않겠다라고 할 수 있다.

 

 

 

『페스트』의 리외의 경우

『페스트』에서는 카뮈의 입장이 더욱 적극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의사 리외는 페스트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보장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죽는다. 전염병은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리외는 환자를 치료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대사가 나온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정직성이다.” 리외의 정직성이란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지프 신화』의 반항이 『페스트』에서는 연대와 행동으로 발전한다고 볼 수 있다.

 

 

 

『전락』의 클라망스의 경우

부조리의 관점에서 보면 『전락』의 클라망스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부조리를 깨달았지만 그것을 건강하게 극복하지 못한다. 자신의 위선과 허영을 발견한 뒤 그는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려 한다. “나만 위선적인 것이 아니다. 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오히려 타인에게 죄를 나누어준다. 따라서 클라망스는 부조리를 발견했지만 반항과 연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심판과 타인심판의 악순환에 빠진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전락』은 『페스트』와 대조된다. 클라망스는 부조리를 발견했지만 결국 자기혐오에 빠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에 반항하는 삶의 실천을 하지 않고 오히려 타인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클라망스는 부조리를 알게된 인간이 실패한 경우를 보여준다. 그 반면에 『페스트』의 주인공 리외는 부조리를 발견하고 세상에 반항하여 궁그적으로는 타인을 돕는 행동을 실천하게 된다.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카뮈의 여러 작품을 읽고 그 결말을 취합하여 개념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삶의 태도를 추론할 수 있다. 첫째,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죽음, 고통, 우연, 실패를 삶에서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둘째, 확실하지 않은 궁극적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을 모른다면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셋째, 그렇다고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확시하게 보장되지 않아도 살아간다. 넷째, 나는 세상의 부조리에 반항한다.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가능성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것이다. 다섯째,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경험한다. 삶의 가치를 반드시 영원한 목적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여섯째, 타인의 고통 앞에서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부조리의 발견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체념이 아니고 세상에 저항하는 살아간다는 점이 특히 중요해 보인다. 이상이 여섯 가지 태도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세계가 나에게 궁극적인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반항하며 살아가는 행동을 한다!”

 

 

 

카뮈 철학과 추리소설과의 유사성

카뮈가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삶의 자세는 부조리를 해결하는 삶이 아니라, 부조리를 알고도 인간답게 행동하는 삶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면 이 지점에서 카뮈의 철학은 추리소설적 질문과 상당량 유사하다. 세계가 왜 이렇게 부조리한가?라는 추리 대상의 사건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다. 그러나 탐정이 사건의 모든 비밀을 풀지 못한다고 해서 수사를 포기하지 않듯이, 인간 역시 세계의 궁극적인 답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삶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카뮈에게 삶은 ‘해답을 얻은 뒤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해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수행하는 탐정의 조사에 가깝다. 그 조사의 방향이 바로 반항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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