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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이 올 추석도 가족이 모였다. 추석 연휴 동안에 실로 오랜만의 영화관람을 했다. 온 가족이 모여 재미난 서부활극 같은 영화를 원했지만 수많은 인파에 밀려 그냥 집에서 디비디로 시청을 했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빌리지라는 영화였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코빙톤 우즈라는 작은 마을은 흡사 물질문명과 격리된 전근대의 배경이었다, 평화로운 삶을 위해 이곳에 모여든 소수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그들만의 부락을 이루어서 살아가고 있다. 겉으로 보면 평화롭고 목가적인 마을이지만 주민들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숲 속에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숲의 괴물과 주민들 사이에는 묵시적인 정전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마을 청년 노아 퍼시가 정신질환을 앓자 또다른 청년 루시우스 헌트가 마을 원로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숲 너머 마을에서 약을 구해올 목적으로 숲 안으로 들어갔다가 공포에 눌려 돌아온다. 마을을 벗어나려고 했던 루시우스는 마을 원로회의 지도자인 에드워드 워커로부터 암묵적인 질책을 받는다. 그런 루시우스에게 워커의 딸인 아이비가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진다. 한편 정신질환자인 노아 퍼시도 아이비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다.
사방이 숲으로 막힌 코빙톤 우즈는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린 사람들이 모인 이른바 고립 마을이다. 원로들은 숲 속에 거주하는 괴생명체를 두려워하며 경고를 보낸다. 그리고 마을전체는 공포에 휩싸인다. 그러나 코빙톤 우즈에서도 젊은이들의 의지와 사랑은 피어난다. 루시우스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노아 퍼시를 위해 마을 밖에서 약을 구해 오겠다고 청한다. 그러나 원로들의 거절과 마을의 금기로 인해 시도는 좌절되나, 아이비의 사랑을 얻는다. 하지만 사랑에 눈먼 퍼시의 칼에 찔려 루시우스는 중상을 입게 된다. 사랑을 구하려는 맹인 소녀 아이비는 이웃마을에 약을 구하러가게 된다. 지도자인 워커는 이 마을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건립된 것임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외부에 나가지 않겠다는 마을의 규칙을 깨버린다.
규칙의 위반이 징벌이 아니라 새로운 모험이며 사랑의 언어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대책은 마련되어 있다. 세상을 볼 수 없는 아이비는 코빙톤 우즈와 바깥 세계를 연결하는 최상의 매개자가 된다. 그녀를 따라 숲을 벗어난 관객들은 감춰진 비밀의 정체를 알게 되지만, 마을이 생긴 이래 누구도 바깥세상을 본 이들은 없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긴장감 넘치는 아이러니다. 숲과 괴물의 공포를 벗어나 그녀가 세상의 바깥을 대하는 순간 영화는 일대반전이 된다. 그 반전은 19세기의 전원마을에서 현대의 시공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코빙톤 우즈의 사람들이 진짜 무서워하는 괴물은 숲 속에 사는 정체 모를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존재하는 폭력과 범죄라는 괴물이다. 그리고 그 범죄는 가족을 파괴시키는 마물이다. 그런데 폭력과 범죄는 순수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있는 어떤 것이다. 아버지와 남편과 형제와 자식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 괴물을 겪은 사람들이다. 가족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바로 괴물이 사는 숲으로 격리된 코우빙톤 우즈라는 시공을 마들어낸 것이었다.
나는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를 위해 캐나다로 이민간 사람을 알고 있다. 나는 길거리에서 폭력범죄에 당해 정신병을 앓게된 딸을 위해 제주도로 이사간 사람을 알고 있다. 나는 또 뺑소니 운전자에 의해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늘 병원에서 보살피는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가족의 고통으로 인해 고통받는 우리의 가족들이다.
가족은 바로 나다. 평생을 서로 함께 하는 나날을 통해 무조건 사랑하고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곧 가족인 것이다. 행복이란 아주 가까이, 매우 작은 일에 지천으로 널려있다. 해맑은 아이의 웃음과 우리를 낳고 키워주신 할머니의 주름살과 일에 지친 아버지의 흰 머리카락에서도 행복은 묻어난다.
나는 빌리지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보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싶었던 소망을 다소 수정했다. 지금 여기서 내 가족과 함께 얼마든지 행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기에 지금의 행복을 느끼는 쪽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내 이웃의 가족들에게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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