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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퍼니(epiphany)는 아무나 가능한 체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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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스톰 2023. 8. 2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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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퍼니(epiphany)는 아무나 가능한 체험인가.

 

에피퍼니의 일반화

    신의 현현으로부터 그 개념이 예술로 넘어온 에피퍼니의 순간은 신비스럽고 직관적인 통찰력의 순간으로서 일상성의 경험으로서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히 정제된 예술작품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 과거의 정설이었다. 그리고 에피퍼니는 예술의 순수성과 자율성이라는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또는 미학주의 특성을 강화시키는 주요 기법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몇몇 연구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에피퍼니를 세속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려 함으로써 신성성 없는 에피퍼니를 구현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성성 없는 깨달음의 경지는 과연 에피퍼니의 기능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논점이 될 수도 있다.

    한편 조이스의 에피퍼니에 해당하는 내용은 역사와 사회를 넘어서는 범주의 초역사적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주체와 역사에 대한 비전을 갖게되는 것이라면 매우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시각은 신성성이 아닌 일상의 에피퍼니가 가능하다는 것을 조이스가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임스의 소설은 위대한 작가나 천재적 혹은 신성한 작가가 아닌 장삼이사의 체험 소설이 될 수 있도록 그 예술의 문을 열어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조이스가 정립한 에피퍼니의 해설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 카톨릭 학교를 다닌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세계는 가톨릭의 영향이 상당량 나타난다. 가령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에서 제시되는 신의 매개자로서의 사제,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내재하는 신 등은 가톨릭적 세계관의 반영으로 조이스 작품에서 예술가와 예술의 본질을 설명하는 상상력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작중 주인공 스티븐이 내세우는 미학론에는 카톨릭교의 교리가 미학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카톨릭적 세계관이 조이스의 미학론으로 변용되어 사용된 것중 하나가 바로 에피퍼니라고 할 수 있다. 에피퍼니는 조이스가 미학론의 하나로 처음 사용한 이후 조이스 문학론과 모더니즘 미학을 설명하는 중심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에피퍼니는 원래 신의 내재를 입증하는 기적의 표상으로서 예수의 탄생을 지칭하는 종교적 개념이었다. 그런데 조이스는 영웅 스티븐(Stephen Hero)에서 에피퍼니의 개념을 천박한 말씨나 행동 속에서, 혹은 마음속의 기억할만한 단계를 통한 갑작스러운 영적 현현이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영적 현현이란 표현은 종교적이지만, 조이스는 에피퍼니를 작품의 주인공 스티븐의 미학론을 설명하는 일부분으로 사용하고 있다. 결국 조이스는 에피퍼니의 순간을 미적지각(artisticapprehension) 과정의 최종적 단계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소설에서 나타나는 에피퍼니적인 담론들은 미학적 예술적 가치를 지난다는 일반화가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에피퍼니와 돈오

    불교의 각성과 관련하여 순서를 밟아 수행하여 점차 높은 단계의 경지로 나아가 깨달음에 이른다는 점오에 반대된다. 돈오를 처음으로 주창한 이는 중국의 도생이었고 이와 대립하는 점오의 입장도 주창되었으나, 중국불교는 돈오의 입장으로 기울어졌다.

    선종에서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져, 돈오를 점오보다 차원 높은 종교적 입장으로 삼는다. 중국선종에서는 제5대 홍인의 제자 가운데 남종선의 조사가 된 혜능이 수행자가 각기 지니고 있는 불성을 깨달을 때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돈오를 표방한 이래, 점오를 표방한 신수의 북종선을 압도하면서 돈오는 중국 선종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이런 입장은 한국의 선종에서도 계승되었다. 이처럼 돈오가 한번에 깨우치는 순간적인 각성이 도래한다는 점에서 에피퍼니와 흡사하다.

 

소설 창작의 순간도 에피퍼니와 같은 각성이 필요하다

    우리 조상들인 옛선비들이 그려온 문인화는 기교보다는 마음을 중시했기에, 단박에 깨치는 남종선의 돈오와도 일맥상통해 남종화라고도 불렸다. 이러한 남종화를 그리듯이 소설을 창작하는 소설 지망생들에게도 돈오와 같은 에피퍼니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장난이나 무심코 넘겨버릴 우연한 망상이 아니고 일상 속에서 미학적 결정체를 이루어내는 결과물이 아닌지 확인하고 숙고할 필요가 있다. 나는 간혹 소설지망생들의 습작을 보다가 머리가 띵 할 정도로 매혹된 적이 몇번 있었다. 창작자 혹은 창작자가 만들어낸 소설의 주인공이 만나는 에피퍼니는 예술적 상황에서라면 언제나 현현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에피퍼니가 찾아오고 그것을 평생 소설의 장치로 사용하면 작가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속적인 창작의 길이 다소 어렵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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