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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높은 귀족예술은 현대사회에서 가능한가

교육

by 북스톰 2023. 10. 14.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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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높은  귀족예술은 현대사회에서 가능한가

 

귀족적 예술의 수준은 평범하지 않다.

     지난주 막을 내린 미술전시전시회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라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를 보고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고래로 예술세계를 쉽게 접할 수 있던 계층은 단연 특권층이었다. 귀족층은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예술의 창작과 감상을 철저하게 그 후세들에게 교육시켰기 때문에 예술은 귀족계급의 교양과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술창작참여와 감상의 측면에서 소위 예술 전문 생산계급과는 현저하게 달랐다. 그들은 예술을 귀족의 품위와 체면에 어울리는 형식적인 측면과 학문적 완성이라는 이론적으로 현학적인 방향의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세계 예술사를 통해 소위 명장과 거장들은 특히 미술과 음악 분야에서는 천한 계급출신의 전문예술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악사나 화가를 천시했기 때문에 야기된 일일 터이다. 그러나 귀족 출신예술가들의 성과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순수한 아마추어 이상의 전문가로 변신한 귀족출신 예술가들은 세계 문화사의 위대한 자산을 이룩해 내었다. 그들이 예술 창작에 참여하는 방법과 태도는 신분적 한계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정신으로 예술참여가 이루어진 것이다. 원래 의미는 귀족의 의무란 뜻이었지만 이제는 출신성분과는 상관없이 귀족의 정신을 갖고 일하는 진정한 상류층 또는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명가를 지탱하는 힘을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가진 자의 베품과 솔선수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의 자세는 예술창작과 감상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우리나라의 수준 높은 예술미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경우 예술계에서 상류계층의 참여는 시문이나 서예는 꽤 흔해도 음악, 미술 분야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다. 대가야국의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가야고를 만든 일이나 고구려 유리왕이 황조가를 지은 일은 사회적 정치적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또한 신라말 경덕왕이나 헌강왕이 향가를 부르며 가무를 즐긴 일이나 고려말 충렬왕 등이 연극에 탐닉한 것들도 사회적 목적이나 개인적 기호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왕가나 사대부가의 예술활동은 특권층의 덕목과 궤를 같이하기 시작한다.

     조선초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가야금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해졌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다. 특히 시문과 서예에 뛰어나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서풍은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높은 경지에 이른 명필이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꾸며 김종서 등을 죽일 때 억지로 죄를 씌워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렸다. 시문 그림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혀, 중국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갔다 한다. 글씨는 조맹부체를 본받아 썼으며, 만일 그가 장수했다면 서화가 크게 발전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림에도 뛰어나 화가 안견과도 친분이 깊었다. 왕가 출신답게 정치 외교분야에서 그의 서화가 빛을 발하였다.

     윤두서는 우리 회화사상 조선 중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화가이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이다. 당쟁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전라남도 해남의 연동(蓮洞)으로 낙향하여 그림과 글씨를 벗하며 보냈는데, 특히 인물화와 말 그림을 잘 그렸다. 그의 그림은 정약용에게도 은연중 영향을 미쳐 실학적인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 남종화풍 영향을 받았다. 한국 최고의 초상화로 평가받는 불후의 명작 자화상(국보240)은 매우 특이하다. 부리부리한 눈매, 거울을 보고 그린 듯 한올 한올 사실적이면서 불타오르는 수염. 넘치는 생동감과 파격적인 생략은 보는 이를 섬뜩한 공포로 몰아넣는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미완성작이었다. 두 귀가 빠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술성마저 미완성인 것은 아니다. 콧구멍 코털까지 그려낼 정도로 철저한 윤두서의 사실성에서 실학 이데올로기가 느껴진다. 실물과 터럭 한올이라도 윤두서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자 한 이 사실성은 그의 냉엄한 관찰에서 나온 것이며 그 관찰은 내면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자 선비 정신의 표출인 것이다. 윤두서의 경우에도 실학적인 면모가 화풍에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특정계층의 이데올로기는 그 예술의 범위와 성격을 특징짓게 되는 것이다.

     조선의 양반출신의 서화가들은 여류서화가인 신사임당, 허난설헌 외에도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있었지만 양반층의 이데올로기와 조선정치세력의 범주를 넘어서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반상사회규범인 상류층의 제도적 한계이기도 하지만 계급사회의 상류계급에 자리한 귀족출신 예술가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한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다. 고증학의 신봉자였던 박제가(朴齊家)의 인정을 받아 그의 문하생으로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예술은 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도합 11년을 귀양살이로 지샌 셈이다. 59세 때인 1844년 제주 귀양지에서 그린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세한도(歲寒圖)" 이다. 이 그림은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書卷氣)가 넘친다고 평가받았다.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 두루 통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祭日通儒)>라고 칭찬하였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에게는 추사가 외8촌 형님이었고 청년 대원군은 추사로부터 난을 치는 수업을 받은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또한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겨 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를 구현하려 하였다.

 

오늘날 수준 높은 예술의 창작과 감상은 필요한가.

    예술 창작과 감상을 교양덕목으로 체득한 귀족 출신 예술가들은 귀족적 의무로서 대사회적이고 현학적인 방법으로 예술창작과 이론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거장들이 세계의 예술사를 주도하였다. 이처럼 예술접근 방식에 있어 귀족적인 교육방법이 효과적이며 긍정적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 소위 시민사회라는 현대에서 귀족적 예술 창작과 소비는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그럴 가치가 없는 것인가. 현대사회에서 귀족 예술이란, 소수의 부유한 계층을 위한 예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술은 일반적으로 대중적인 취향과는 거리가 있으며, 고도의 기술과 지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예술가의 창의성과 개성을 중시하며, 상업적인 가치보다는 예술적 가치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민주화 평등사회인 오늘날에도 귀족 예술의 예술은 존재한다. 고가 호가하는 현대미술은 현대미술은 전통적인 미술 양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추구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대중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소수의 예술 애호가들에게는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도한 오페라는 음악, 가극, 연극이 결합된 종합 예술이다. 지나치게 높은 입장료로 인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술분야는 부유한 계층의 문화적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소위 귀족적 예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귀족의 자리를 부유층들이 차지했고 그들의 향유물인 고급예술을 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예술의 대중화를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발전시키고 향유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회 지도층과 예술작가 그리고 소비자들이 서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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