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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왜변과 춘생문 사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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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스톰 2023. 10. 1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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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왜변과 춘생문 사건의 기억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전모

    엊그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억하자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억울하고 비참한 심정이 들었고 준엄한 역사의 진실이 느껴진 기사였다. 1895108일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가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은 벌써 백년이 훌쩍 넘었다. 명성황후는 건청궁(乾淸宮) 내 곤녕합(坤寧閤)에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를 받은 일본군 한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 폭도들은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 언덕 녹산 자리에서 태우고 그 자리에 묻었다. 이후 왕실에서 이를 거두어 경운궁(현 덕수궁)에 시신을 안치하고 국장을 지냈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부른다.

    잔혹한 일인들은 명성황후를 칼로 찔러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이처럼 일본군과 낭인(浪人)들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을미왜란은 전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할 엄청난 사건이었다. 새로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러시아에 접근을 주도한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은밀히 세우고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 병력과 일본인 낭인배경관상인 등과, 해산설로 불만이 있던 훈련대 간부 등을 앞세워 새벽 궁궐에 침입했다. 이때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이 폭도들과 맞서다가 죽고,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시신이 불태워졌다.

 

춘생문 사건과 이도철공

    이 사건 후 미우라가 입궁하여 친일파 인물을 중심으로 내각을 서둘러 구성하는 한편,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은폐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목격한 미국인 고문 W.M. 다이와 러시아인 G. 사바틴의 폭로로 진상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일본의 입장이 불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은 미우라와 그 일당을 소환하여 히로시마[廣島] 지방재판소의 예심에 회부하는 형식적인 절차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결국 이들은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이후 궁은 시위대까지 훈련대에 편입된 상태에서 고종은 사실상 일본에 의한 유폐 상태였다. 이때 울분을 참지 못한 제천출신의 참령 이도철(李道徹)과 시종 임최수(林最洙)가 주동이 되어 고종을 구출하고자 1128일 약 800여 명의 군인을 인솔하고 안국동을 경유해 건춘문을 열려다 실패하자 삼청동으로 방향을 바꿔 춘생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내응을 약속했던 2대대장 이진호가 군부대신서리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궁성 내에서 숙위하던 친위대가 진압에 나섰다. 끝까지 저항하던 이도철 공은 불가항력으로 춘생문을 넘어 전투 중 잡히고 말았다.

     이를 춘생문사건이라고 하는데, 왕후를 살해한 일본인 흉도들이 처벌받지 않은 데 비해 이 사건 관련자들은 법부대신 장박(張博)이 주관한 재판에서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이도철과 임최수는 사형을 받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고종황제를 연루시키지 않고 의연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도철의 면모

    제천의 향교 교장을 지낸 충민공 이도철의 기개와 충정이 다시 한번 떠오른다. 오늘날 제천이 의병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 그 밑거름에 이도철공의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의 토대 위에 우리의 오늘이 있다 해도 과언 아니다. 돌이켜보면 오늘날 기성세대는 과어 조상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토양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감이 든다. 독도문제와 대미관계, 교육문제 등등 켜켜이 쌓인 난관들 앞에 기성세대는 언제나 후손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한다. 그런 점에서 이도철공의 결단과 실천은 훌륭한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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