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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이대(受難二代)하근찬 - 슬픔을 극복한 힐링의 느낌

소설책

by 북스톰 2024. 1. 23.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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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이대(受難二代)하근찬 - 슬픔을 극복한 힐링의 느낌

 

희망은 어떻게 해서든 가질 수 있다는 생각

     수난이대(受難二代)라는 말 그대로 2대에 걸친, 긍까 아버지와 자식이 겪는 환난의 역사를 기술한 소설이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남방지역에서 팔 하나를 잃었고, 아들은 6.25 전쟁에 참전했다 다리 하나를 잃었으니 한 가족으로 겪은 엄청난 수난이었다. 무사히 귀환하리란 기대로 역으로 마중나갔지만 뒤늦게 목발에 의지하여 절뚝이며 다가오는 아들을 보며 억장이 무너지는 아버지의 슬픔은 한이 없다. 순간의 실망과 좌절로 아들을 뒤에 두고 나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지만 가는 길에 단골 주막집에 들러선 국수를 곱배기로 주문하여 아들에게 먹이고, 개울을 만나자 아들을 업고 건넌다. 장차의 삶에 실망하며 풀이 죽은 아들을 다독이며 함께 힘을 모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격려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희망을 보고 웬일인지 그 서러움 속에서 힐링이 되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생긴다

    ​소설 수난이대는 그야말로 세대에 걸쳐 아들과 아버지가 겪는 수난, 즉 계속된 시련을 겪는 두 부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잔혹한 민족사를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강제 징용을 당해 팔 하나를 잃은 아버지 만도와 6.25가 끝나 귀향하지만, 다리 하나를 잃고 온 아들 진수의 상봉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처음에 아버지 만도는 아들의 부상에 크게 분노하다가도 이내 체념하며 그래도 목숨만 붙어있으면 다 사는거라며 죽고싶어하는 아들 진수를 위로한다. 둘은 그 후 외나무 다리를 건널 때 아버지 만도가 아들 진수를 등에 업고 다리를 건너면서 앞으로 막막한 상황에서도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혹자는 두팔이 없거나 두 다리가 없다면 죽느니만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것을 없애버리지만 살아있기만 하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결국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장애가, 혹은 장애를 가진 불완전한 마음이 힐링이 되고 극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수난이대 인물들의 상징성

     작중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박만도는 본인의 모습도 비극적이나 아들의 비극까지 감당해야하는 불운의 캐릭터이다. 그는 10년 전 일본의 강제 징용에 끌려가서, 방공호 작업을 하다가 고된 노동을 하던 중, 팔 한 쪽을 잃어버린다. 그 후 아들이 6.25에 전쟁에 참전하여, 아들 진수 역시도 전투 중 한 쪽 다리를 잃었다. 우리나라 근 현대사에 일제감점기와 6.25전쟁이라는 가장 큰 혼란의 시기에 두 부자는 팔과 다리를 각각 잃어버린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갖게된 상징성을 갑게된다. 하지만 박만도는 자신을 불구로 만든 일본의 만행과 아들을 장애인을 만들어버린 동족상잔의 전쟁에 대한 분노나 원망은 뒤로하고,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가려 한다. 이 대목에서 삶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해서든 살아진다는 가능성과 희망의 길을 노정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슬픔보다는 힐링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행을 보는 시각의 변화

     수난이대의 주인공 박만도는 6.25때 입대한 3대 독자인 자신의 아들 진수, 만도가 너무나도 아끼는 아들이 돌아온다고 해서 만나기 위해 읍내로 나간다. 고등어를 산 뒤, 아들을 기다리며 본인의 비극적인 과거를 회상하는데, 일제 강점기 시대, 강제 징용으로 남양의 어떤 섬으로 끌려갔다. 그 곳에서 비행장을 닦던 중 갑작스러운 폭발 사고로 인해 왼 팔을 잃는다. 회상이 끝나고 마침내 아들이 탄 기차가 도착하고 만도는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진수의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 보는 그 순간, 그의 눈에 아들이 다리 한 쪽을 잃고 목발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의 눈에 들어온다. 만도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하기도 하고 분노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여기서 삶을 포기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한번 쯤을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삶을 포기한다면 살아가면서 생기는 희망과 힐링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불행한 삶과 행복한 삶을 동시에 이끌어가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행과 행복은 동시에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양립시키는 능력인 양가성이라는 개념을 갖게 된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불행도 어쩌면 힐링의 재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살게 되면 살아진다고 노래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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