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소설에서 주로 나타나는 무거운 사회의식을 벗어나는 1960년대의 소설 중에 김승옥의 작품이 가장 눈에 띈다. 그는 관습과 인습을 거부하는 인물들의 행동은 김승옥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성이다. 김승옥 작품 속 인물들은 폭력, 살해 모의나 강간 및 자살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반도덕적인 인물들의 과장된 자기 파괴와 환멸에 대한 문학적 물음에 대한 답은 김승옥 소설을 읽는 새로운 관점을 통하여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지나친 엄숙주의에 대항하는 행동으로서, 이데올로기 담론에 대한 도전이다.
서울대 문과학생인 주인공 정우가 학교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낙향한 뒤 고향의 옛친구들과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환상수첩」에서 그가 가진 고뇌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련의 사건들과 고향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가 가진 사회에 대한 불신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서사를 이룬다. 이 텍스트는 춘화를 팔아서 약을 사 먹으며 사는 폐병을 가진 수영과 그를 증오하지만 그의 모델이 되어줌으로써 수영의 일을 돕고 있는 윤수, 화재로 인하여 가족을 잃고, 실명을 하게 된 착한 형기를 통하여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다.
불치의 병으로 인식되었던 폐병을 앓는 수영은 법학도였지만, 춘화를 파는 불법을 자행하며 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닌 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변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법을 수호하기를 원했던 인물이 법을 어기며 살아갈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주면서도 미안해하기는커녕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주어지는 운명에 대한 도전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러한 수영을 증오하는 윤수와 정우 또한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다. 기생집에서 거의 살다시피하는 윤수와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다른 친구에게 넘겨버리는 정우도 반도덕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윤수와 정우는 비윤리적인 수영 앞에서는 그러한 증오심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아직 수영과 달리 선과 악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죄와 벌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으므로 고통을 받지만, 이러한 개념조차 초월한 수영은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하다.개인주의라기보다는 이기주의에 가까운 수영의 독백을 통한 결말은 윤리와 반윤리 사이에서 고뇌하던 윤수나 정우보다는 비윤리적인 수영에게 서사의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윤리와 반윤리가 공존하며 그 공존이 세계의 혼란을 드러내는 방식은 분명히 양가적 입장이다.
전통적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수영모(母)와 수영의 누이는 수영에 의해 부정되고, 수영은 반윤리적인 행위를 일삼는 윤수와 정수에게 부정되며, 윤수나 정수는 다시 수영에게 부정되는 구도를 보여준다. 이것이 환상수첩에서 보여주는 비판적 담론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수영의 누이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수영에 의해 강간을 당한 것과 진배없으며,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장남이 가족을 부양하지 않고, 오히려 사지로 내모는 수영을 통해 가족의 의미는 퇴색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친구동생을 강간한 건달배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게되는 윤수를 통해 정의라는 이름이 무색해지며, 결국 사회에서 버티지 못하고 자살을 해 버린 정우에 비해 자신만의 생존을 추구하는 수영만이 온전히 남는다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 윤리와 반윤리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양가성은 세상을 조롱한다. 최소한의 양심, 사회적 안전성과 맞바꾸어버린 춘화는 비싼 가격에 팔리어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 목표인 화폐로 매개되는 것이다. 즉, 그의 비판적 담론은 진실과 양심이 사라져 가는 이 사회를 양가적으로 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에 냉소적으로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는 서술이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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