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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의 아들. 풍장(豐璋), 풍장왕(豊障王)이라고도 한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했을 때 일본의 지원을 받아 백제의 부흥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당의공격이 강행되던 시기에 일본에 머물던 부여풍은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을 꾀한 의자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당시 부여풍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되기도 했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의자왕과 왕족, 대신들이 당에 압송되고 백제가 멸망한 뒤 일본의 지원을 얻어 백제부흥을 꾀하여, 661년 일본군 오천명명의 경호를 받으며 백제로 귀국한 부여풍은 백제 유민과 함께 백제 부흥을 시도했다. 백제 저항군은 웅진성을 포위공격해 당군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663년 금강 입구에서 일본이 보낸 천여척의 함선으로 나당연합군과 싸워 대패하면서 저항은 소멸되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한국의 사서에서는 부여풍을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서는 마지막 왕으로 칭하고 있다. 18세기 문인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부여풍을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보았다. <삼국사기>,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일본서기> 등에도 부여풍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부여풍은 의자왕의 태자로서 631년에 일본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여 의자왕을 포함한 2천명에 이르는 왕족과 대신들이 당나라로 압송되고 백제가 멸망했지만, 백제 유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중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것이 복신과 도침이었다. 이들은 주류성을 근거로 당군과 싸우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구원군의 파견과 함께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했다. 소위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백제 멸망 이듬해인 661년, 부여풍은 일본의 천지왕(天智天皇)이 지원해 준 일본군 오천명의 경호를 받으며 귀국하여 다시금 백제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백제의 서부와 북부 지방이 모두 이에 호응하여 세력을 떨쳤다. 저항군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주둔한 웅진성을 포위 공격하여 당군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곧 복신과 도침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여 병권을 장악했고 부여풍과 복신 사이에도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복신은 굴방에 누워 부여풍이 문병을 오면 죽이려 했으나 부여풍이 먼저 알아채고 심복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죽인 뒤 고구려와 일본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는 한편, 당군에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곧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당나라 대군에게 패했다. 이어 신라의 문무왕(文武王), 당의 유인궤(劉仁軌), 당에서 보낸 부여융(扶餘隆) 등이 총공격을 해왔다. 그는 663년 금강 입구에서 일본군 일천여 척의 배로 나당동맹군과 싸웠지만, 전술의 오류로 일본군 함선 400여 척이 불타는 등 크게 패하고 궤멸되었다. 부여풍은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다고 전하지만 행방은 분명하지 않다. <일본서기> 등 일본의 기록에서는 부여풍이 백제부흥운동과 함께 백제의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서는 백제 왕조는 부여풍의 아버지인 의자왕에서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의 멸망은 통상 의자왕대인 660년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풍장왕을 인정하면 3년 뒤인 663년이다 이럼 미묘한 문제는 초중고 역사교육의 기록변화라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푸장왕은 의자왕과 이천영 관료들이 당으로 끌려간 이후 백제 땅에서 왕으로 즉위했으니 일단 왕조가 살아 있다고 본다면 백제의 멸망시기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백제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지 1년여 만에 새로운 풍장왕을 내세워 부활한 것이니 부흥백제왕조의 정통성이 확립됐다. 그래서 백제의 마지막 왕이 의자왕(641~660)이 아니라 풍왕(661~663)이라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순암 안정복(1712~1791)은 <동사강목>에서 백제의 32대 왕으로 풍왕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백제의 역사는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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