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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후 의자왕과 이천여 명의 관료들이 당에 끌려가고 백제 땅에 남아 있던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의 인물들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복신과 도침의 부흥군 세력은 나날이 커져서 최대한 3만 명이상의 군사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들은 강한 기세로 과거 백제의 성 이백여 개를 되찾았다. 그리고 이미 신라군이 주둔중인 사비성을 되찾기 위해 고분분투했다.
백제 부흥군 운동 세력은 일본에 있는 왕자 풍에게 새로운 백제의 왕이 되어 달라며 귀국을 요청했다. 왜냐하면 당시 태자였던 부여융이 의자왕과 함께 당에 끌려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백제 멸망 소식을 듣고 복수의 칼을 갈던 둘째 왕자 부여풍은 즉시 일본의 천지왕에게 부탁하여 백제에 구원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여풍은 오천 명의 일본군과 함께 백제로 돌아와 부흥군 세력에 합류했다. 661년, 부여풍은 일본의 천지왕(天智天皇)이 지원해 준 일본군 오천명의 경호를 받으며 귀국하여 다시금 백제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부여의 궁성으로 돌아왔는데 어느 항구를 통해서 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백제의 잔류병력과 일본군 오천 명이 가세하여 하나의 큰 세력을 이루었다. 그리고 당시 백제의 서부와 북부 지방이 모두 이에 호응하여 세력을 떨쳤다. 저항군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주둔한 웅진성을 포위 공격하여 당군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백제 부흥군 세력은 많은 성과를 냈고 승승장구하던 백제부흥군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의자왕의 사촌 동생인 복신은 승려인 도침이 많은 공을 세우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 못마땅한 나머지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여풍 왕자 역시 겉으로만 자신을 왕으로 내세울 뿐,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복신을 두려우한 나머지 결국 복신을 죽이고 만다.
한편 당나라 군사들은 백제 유민들이 부흥 운동을 한창 벌일 무렵,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에 여념이 없어 미처 백제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신라만의 힘으로 전세가 어려워지자 당나라가 뒤늦게 참전하게 된다. 당은 왕자 백제의 포로인 왕세자 부여융에게 당이 지원을 해 줄 테니 백제 부흥군을 무찔러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부여융 태자는 백제를 부흥시키려는 세력을 막아달라는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전쟁에 출전했다 여기서 백제의 두 왕자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게 되는 불운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부여풍은 복신을 죽인 뒤 고구려와 일본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는 한편, 당군에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곧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당나라 대군에게 패했다. 이어 신라의 문무왕(文武王), 당의 유인궤(劉仁軌), 당에서 보낸 부여융(扶餘隆) 왕자 등이 총공격을 해왔다. 그는 663년 금강 입구에서 일본군 일천여 척의 배로 나당 동맹군과 싸웠지만, 전술의 오류로 일본군 함선 천여 척 중 사백여 척이 불타는 등 크게 패하고 일본군 해군은 궤멸되었다. 그리고 육지에서도 백제 일본의 연합군은 나당 연학군에게 대패한다. 금강처럼 크지 않은 강에 일천여 척의 일본 해군이 이미 진을 치고 있던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퇴로가 없느 상황에서 그대로 패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여융은 당의 장군 유인궤와 함께 수군을 이끌고 백제 부흥군이 본부가 있는 주류성을 쳤다. 내분으로 힘이 약해진 백제 부흥군 백마강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고 비운의 왕자 부여풍은 고구려로 피신하여 다시 훗날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마저 멸망하고 부여풍은 당에 포로로 끌려가 유배되었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태자 부여융은 부흥군을 무찌른 후, 당이 백제를 지배하려고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도독이 되어 조국을 배반했지만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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