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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장군에 대하여

소설공부

by 북스톰 2024. 4. 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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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장군에 대하여

 

알려지지 않은 을지문덕의 정체

     을지문덕장군은 살수대첩의 명장이지만 역사에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기가 어렵다. 한국의 삼대대첩인  살수대첩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귀주대첩의 강감찬 장군이나 한산대첩의 이순신 장군에 비해 주인공의 출신 배경, 생몰 등이 전무한 것이다. 심지어 그의 성씨가 을지씨인지 아니면 성이 을씨인지 혹은 위씨나 위지씨인지도 불분명하다. 좌우간 그는 고구려의 장군으로 중국측 기록인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위지문덕(尉支文德)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薩水)에서 벌어진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장군으로만 알려질 뿐, 생몰년을 포함하여 개인과 관련된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어떠한 문헌에 근거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그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혹자는 그가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 사람인가?

    을지문덕의 성인 을지에 대해서는 고구려 관등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나 가부장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을만을 성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을파소와같이 을씨성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런데 평양출신의 다른 을지씨가 고구려에서 고관대작을 역한 바가 없어서 과연 을지씨의 후손인지는 불분명하다. 또 선비족 계통의 성인 위지(尉遲)와 을지를 같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로 귀화한 선비족 계통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문제도 이상한 것은 선비족 게통의 귀화인이 고구려의 총사령관을 맞는다는 것도 의문스러운 점이다.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수나라의 수양제는 아버지 수문제의 복수를 위해 고구려 정벌을 위해, 영양왕에게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도록 했으나 영양왕이 거부하자, 이를 핑계로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다. 612(영양왕 23) 수양제는 수륙 113만에 달하는 대군을 직접 인솔하고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요동성(遼東城)에서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한편 수군(水軍)은 대동강을 거슬러오면서 정병(精兵) 4만을 선발하여 거짓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쫓아 평양성 안에 들어왔다가 거의 궤멸되었다. 평양성을 공격한 수군(隋軍)은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의 지휘하에 30만 별동대를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켰다.

     이때 영양왕은 을지문덕을 보내 적진을 엿볼 겸 위장 항복을 하게 하였다. 우중문은 앞서 양제에게서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말려서 돌려보냈다. 우중문이 곧 후회하고 다시 잡으려 했으나 을지문덕은 즉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속은 것을 안 수군은 압록강을 건너 추격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적군의 군량미 부족 간파하고 하루에도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도망가는 등 거짓으로 패주하면서 적군을 더욱 피로하게 했다.

    겨우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도착한 적군에게 "신비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오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했다. 전쟁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원컨대 족함을 알고 그침이 어떠랴(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라는 5언시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철군하면 왕을 모시고 조견(朝見) 즉 고구려왕인 제후가 수나라의 천자인 수양제를 찾아가 인사를 하겠다고 전했다. 적군은 거짓임을 알면서도 군량이 부족한 데다 군사들이 지쳐 고구려군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군사를 출동시켜 사방에서 적군을 추격하면서 살수에 도착한 적군이 강을 건널 때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살아돌아간 자는 불과 2,3천명에 불과했다.

 

살수대첩 이후

    살수대첩에서의 승리는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 등 한반도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수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수나라의 양제는 패전한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책임을 지워 죄수 취급을 했다. 수양제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이때의 기록에는 을지문덕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수양제가 618년 근위병들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수나라는 멸망했고, 이연이 당나라를 세웠으므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중국의 역사를 바꾼 대사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승리의 주역인 명장,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살수대첩 이후 고구려 역사에 남아있지 않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을지문덕에 대하여 수나라를 막아 나라를 구한 것은 오직 을지문덕의 공이라고 상찬했다. 조선의 숙종은 을지문덕의 공을 기려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하사하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토록 했으며, 단재 신채호는 민족 자존심을 드러낸 한반도에서 유일한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그래서 혹자는 을지문덕이라는 가명을 쓴 다른 장군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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