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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대사는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고려부터 유행한 풍수지리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호는 연기(烟起)이며 자는 옥룡자(玉龍子) 및 옥룡(玉龍)이다. 원효, 자장, 의상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 있는 여러 오래된 절들의 최초 창건자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물론 다른 전설적인 고승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해당 사찰들의 역사와 가치를 과장하기 위한 허구로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만약 사찰 경내에 신라식 삼층 석탑이나 당간지주가 있거나 삼국유사 등 당대 기록에 가까운 사서에 기록이 있다면 기나긴 역사성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도선이나 원효 등이 그 많은 사찰을 일일이 창건했다고 보기에는 이들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사찰이 전국에 너무 많다. 그것은 그가 신라말의 가장 저명한 승려이기 때문에 그 같인 기록과 증거물들이 산재해있을 것으로 본다.
출가 전 속세에서의 성은 김씨로 827년에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나 선각국사비에는 태종 무열왕의 서자 가문이라는 추측이 있다고 전한다. 어머니도 성명이 모호한데 강씨(姜氏) 혹은 최씨라고도 한다. 도선국사는 십오세인 841년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846년에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태안사 혜철(惠徹) 화상 밑에서 수학했으며 큰 명성을 얻어 신승(神僧)이라고 불렸다. 864년(38세)부터 전라남도 광양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 이후로 호가 옥룡자가 되었다. 언제나 제자 수백 명이 모여들어 그의 강론을 들었다고 한다. 어찌나 명성이 높았는지 당시 신라의 임금인 헌강왕이 도선의 명성을 듣고 궁궐로 초빙하여 직접 법문을 들었을 정도였다. 898년에 향년 72세로 입적하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고려에서 현종이 가장 높은 고려 선종 법계인 '대선사', 숙종이 임금의 불교 스승인 '왕사', 인종이 최종적으로 '선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의종이 선각국사비를 세워 그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그는 신라와 고려에서 긱즌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도선대사는 승려로서보다는 한국의 음양풍수설, 풍수지리의 원조이자 대가, <도선비기>로 대표되는 예언가로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지리산에서 수도하던 시절에 이인(異人)을 만나 풍수지리를 배웠다고도 하고, 당나라에 유학하여 풍수지리를 배웠다고도 한다. 도선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했다는 전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이인을 만났다는 것은 증명할 방법이 없다. 당시 풍수지리 이론은 당나라에서 성했는데, 스승 혜철 화상이 당나라에 유학했기 때문에 혜철 화상에게서 풍수지리도 배웠다는 설도 있다.
도선대사가 예언가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가장 중요한 계기는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했다는 이야기이다. <고려사> 고려세계에서는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의 내용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다시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했는데 바로 연경궁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당시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왔다.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저택을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 하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알려주자 세조가 급히 좇아가 만나보고는 마치 진작부터 안 듯 친밀해졌다. 그리고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조사하고 천문과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지맥은 임방(壬方, 북쪽)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이어져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 그리고는 봉인한 봉투를 만들고 그 겉봉에다가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썼다. 그때가 당나라 희종 건부(乾符) 3년(876)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가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도선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책은 옥룡기, 도선비기, 삼각산 명당기 등이 있으나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 등에 인용된 일부 구절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고려사 신돈 열전에서 도선비기에 "승려도, 속인도 아닌 자가 나라를 망친다."라고 적힌 구절을 가지고 공민왕 당시 정세운 등이 "이 구절은 지금의 신돈을 가르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부분과 숙종(肅宗) 원년인 1096년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천도를 주장할 때 도선비기(道詵秘記)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경우 등이 있다.
또한 도선이 지었다는 예언서 <도선비기>에는 조선왕조 건국 이후의 사실들도 예언이 되어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1457) 5월 26일자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 문서를 사처에서 도선비기를 폐기하라는 명을 했다는 기사가 있다. 성종 즉위년 도선비기를 전국에서 압수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도 있다. 도선비기에 나오는 왕건의 위대한 등이 조선조에서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도 많은 풍우가들이 도선의 이론을 따른다느 점을 보면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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