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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장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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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스톰 2024. 4. 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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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장군에  대하여

 

     김인문은 신라의 진골 왕족으로 태종 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이며 군인이자 관료, 외교관. 그 중 아버지 김춘추를 이어받은 외교관으로서의 행적이 가장 주목받으며, 신라의 대 당나라 외교 전담으로 당나라 주재 신라 대사 역할을 수행했다. 신라시대 김유신과 더불어 가장 높은 지위인 태대각간에 오른 다른 한명이다. 신라의 중앙군인 9서당의 지휘관인 대당사관을 역임했고 당으로부터는 보국장군 같은 2품 장군직에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같은 종 1품 서열 1위 품계를 받기도 한 장군이다. 당나라는 김인문에게 무산계 품계를 주고 무반직을 주어 무관으로 대우했다. 딱 한번 문관으로 대우했는데, 나당전쟁 와중에 신라 문무왕이 못마땅했던 당나라 고종은 신라왕의 동생인 김인문에게 당 조정에서 가장 높은 품계를 주고 신라국왕에 봉하였다. 사실 말도 안되는 일인 것이 신라의 왕은 김인문의 친형인 신문왕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인문이 죽어도 안 받고 버티자 결국 작위를 폐기하고 계림대도독부의 명목상 수장으로 명했다가 후에 김인문의 관작을 없는 일로 했다.

 

김인문의 생애

    어릴 때부터 유교 등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진덕여왕 재위기 친당정책에 의해 651, 23세 때 처음 당나라에 입조하여 653년까지 2년간 당에서 머물었다. 이후 당고종의 측근에서 숙위(宿衛)하기도 하고 당나라와 신라를 왔다갔다하며 양국 간 중재에 힘썼다. 기록을 보면 황해를 건너 당나라에 넘어간 것이 7번이고, 당에서 체류한 시기를 합하면 22년이다. 66세에 타계했으니 그의 생애 삼분의 일을 당에서 보낸 것이다. 당에 머무르면서 황제를 비롯한 고위층과 교류하면서 유학자의 식견을 한층 더 갖추게 되었다.

     655년 고구려, 백제, 말갈이 신라 북부 33개의 성을 점령해 큰 위기에 처했다. 656년 압독주(지금의 경북 경산시) 군주에 재직하면서 장산성을 쌓는 등 신라에 잠깐잠깐 머물 때는 신라의 내정을 맡아 장군이 되기도 했다. 이 압독주는 대야성 전투(642)로 백제에게 대야성을 내준 이후 백제에서 신라 수도 서라벌을 공격하는 경로의 핵심 방어거점이었으며 바로 전까지 김유신이 지키던 곳이기 때문에 이것도 단순한 일개 지방 행정경력이 아니라 신라의 국방체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김인문은 외교과 이외에도 신라에서 큰 전투가 있을 때는 귀국해 지휘관으로 여러번 참가한 장군이다. 661년에 백제 부흥군과 교전해 이기기도 했고 661년 평양성 보급에 참여하는 등 2, 3차 고구려-당 전쟁에 참여했고 그 중 668년 고구려 정벌 때는 항복한 보장왕을 당의 군영 앞에 데려다 놓고 당의 이세적 앞에서 보장왕의 죄를 세었다고 되어 있다. 이 전투의 공으로 식읍 500호를 받았다.

 

당나라와의 관계

     기록에 의하면 당고종이 김인문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인문이 당나라에 매여있는 몸이라 당에 이용되기도 했다. 670년 나당전쟁이 터지자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문무왕)은 당나라에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김인문)는 당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다'라고 하는 등 이간계을 썼다. 674년에는 형인 문무왕이 멀쩡히 있는데도 동생 김인문을 문무왕 대신 명목상의 신라왕으로 책봉해 신라로 보내기도 했다. 노년에 나당전쟁이 끝나고도 귀국하지 못했고 69466세의 나이로 당나라 장안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신라로 이장되었고 사후 김유신만이 받았던 관등인 태대각간이 추증되었다.

 

김인문의 무덤

     김인문의 무덤은 지금도 무열왕릉 바로 앞 도로변 맞은편에 김양의 묘와 함께 있다. 바로 옆에 중앙선 철길이 있어서 기차를 타고 경주에 오는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면서 지름 29.9m, 높이 6.5m의 거대한 김인문의 고분을 왕릉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 무덤은 오랫동안 각간묘(角干墓)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이 무덤 앞에 남아 귀부, 즉 공적을 새긴 비석을 받치기 위해 거북 모양으로 만든 받침돌이 있다. 그런데 묘비에 글이 써 있었을 비석 몸통은 무열왕릉비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떨어져 나가 없어져 찾을 수 없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근처에 있는 서악서원에서 김인문 묘비 비석 조각이 발견됐고 귀부의 이음매와 일치해 김인문의 것으로 판명나면서 김인문묘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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