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 google7f94a714bae2f226.html
온달장군의 진면목
많은 사람들이 온달을 바보로 알고 있으나 그는 사실상 고구려 평원왕(平原王)과 영양왕(嬰陽王) 때의 위대한 장군이다. 평민 출신으로 평원왕의 사위가 되어 577년 북주(北周)의 무제( 561-577)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큰 공을 세웠다. 거란별부(契丹別部)가 수나라에 투항하였는데, 이들은 원래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돌궐(突厥)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으나, 북쪽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었다. 이런 위기감은 남쪽에서도 발생하였다. 한강유역의 점령을 둘러싸고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잦은 전투는 고구려에게도 압박이 되었고 신라의 침범이 발생했다. 영양왕 때인 590년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였으나 온달장군은 아단성(阿旦城)에서 전사하였다. 장군의 진면목은 고구려의 북쪽과 남쪽에서 대단한 공을 세운 명장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온달조(溫達條)에는 온달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의 사람으로, 얼굴은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저자거리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해 왕은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겠다.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고 놀렸다. 공주(公主)가 16세가 되자 왕은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자 공주는 ‘임금은 식언(食言)할 수 없다’며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다. 공주가 귀족과위 결혼을 거부하고 평민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부친인 왕의 말을 바꾸지 않겠다는 고집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는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집과 밭을 마련하고 말을 사서 준마로 키웠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면 낙랑(樂浪)의 언덕에 왕과 신하, 5부의 병사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온달도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말을 타고 달리는 품이 남보다 앞서고 잡은 짐승도 제일 많았다. 왕이 불러서 이름을 묻고는 자신의 사위임을 알고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그후로 군부에서 성장하게되고 지위가 장군에 이르게되었다.
공훈을 세운 왕의 사위 온달장군
북주(北周), 삼국사기에는 後周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대 무제(武帝,재위 561-577)가 요동을 침략했다. 평원왕(平原王)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서 이산(肄山)의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장으로 북주의 군사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왕이 기뻐하여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예를 갖추어 맞이하고,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온달은 왕의 은총을 받으며 위엄과 권세를 누렸다.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어 말하였다.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대왕께서 어리석은 저를 못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가서 반드시 땅을 되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자, 온달은 떠나면서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지만 온달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 대왕이 이를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아단산성의 논란
온달(溫達)이 전사한 아단성(阿旦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광진구 아차산(峨嵯山)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이라는 주장과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溫達山城)이라는 주장으로 엇갈린다. 두 곳 모두에 온달과 관련된 설화와 유적이 전해진다. 그리고 두 곳에서 모두 온달을 기리느 행사와 축제등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차산(峨嵯山)에는 온달이 마셨다는 온달샘 등이 전해지며, 단양에는 온달동굴과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 등이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차산성([阿且山城)이 온달(溫達)의 죽음과 관련된 아단성(阿旦城)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삼국의 형세로 볼 때 고구려의 군대는 남한강의 상류 지방인 단양까지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탈환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고구려인 고선지 장군 (11) | 2024.04.12 |
|---|---|
| 천하무적 연개소문 (10) | 2024.04.11 |
| 김인문장군에 대하여 (8) | 2024.04.09 |
| 신라 장군 이사부에 대한 이야기 (19) | 2024.04.08 |
| 을지문덕 장군에 대하여 (5) | 2024.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