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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다시 읽기

소설책

by 북스톰 2026. 9. 1.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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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다시 읽기

 

인간의 배신을 추적하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1953년에 발표된 필립 말로 시리즈의 장편으로, TIME이 선정한 The 100 Best Mystery and Thriller Books of All Time에도 포함된 작품이다. TIME은 이 작품을 챈들러의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면서, 필립 말로라는 인물을 단순한 장르적 탐정에서 20세기 미국문학의 중요한 문체적 인물로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한다. TIME의 선정 기준 역시 플롯의 완성도, 서스펜스, 독창성, 장르에 미친 영향력이었다. 서구소설 답지 않게 우정과 배신이라는 사건이 추리소설로 형상화된 것이 특이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스토리 속으로

소설은 로스앤젤레스의 사립탐정 필립 말로와 늘 술에 취한 남자 테리 레녹스(Terry Lennox)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레녹스는 얼굴에 흉터가 있고 항상 술에 취해 있는 수수께끼의 남자다. 말로는 그와 술을 마시면서 묘한 우정을 쌓는다. 레녹스는 돈도 없고 사회적으로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말로는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낀다. 어느 날 밤 레녹스가 말로를 찾아와 멕시코의 티후아나까지 태워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자신이 곤경에 빠졌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말로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그를 국경까지 태워준다. 그런데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말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경찰이다. 레녹스의 아내 실비아가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말로가 레녹스의 도주를 도왔다고 의심한다. 말로는 체포되지만 끝까지 친구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은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레녹스가 멕시코에서 자살했고, 자신이 실비아를 죽였다는 자백서를 남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 종결되는 듯하다. 그러나 말로는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여기서 기나긴 이별의 첫 번째 추리적 장치가 시작된다. 죽은 사람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는데도 탐정은 그 자백을 믿지 않는 것이다. 레녹스는 말로에게 오천달라를 남긴다. 특이하게도 그 돈은 평범한 지폐가 아니라 당시 매우 희귀한 5천 달러짜리 지폐다. 이 돈은 이후 사건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말로는 돈을 받았지만 친구가 살인범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법률적 판단이 아니라 친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다. 바로 여기서 챈들러는 일반적인 추리소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탐정이 진실을 찾는 이유가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가 정말 그런 인간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얼마 후 말로는 출판업자 하워드 스펜서의 의뢰를 받는다. 유명한 작가 로저 웨이드(Roger Wade)가 술에 취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말로는 웨이드를 찾아내지만, 사건은 단순한 실종 사건이 아니다. 웨이드는 알코올 중독과 정신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그의 아내 아일린 웨이드(Eileen Wade) 역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연결점이 나타난다. 웨이드 부부는 과거 레녹스 부부와 가까운 이웃이었다. 즉 처음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 보였던 두 사건 말하자면 실비아 레녹스 살인사건과 로저 웨이드 실종사건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말로는 웨이드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쓴 글을 접하게 된다. 그 글에는 웨이드가 자신의 과거와 죄책감, 정신적 혼란에 대해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웨이드에게는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심각한 죄책감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말로는 점점 의심한다. 웨이드는 단순한 알코올 중독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레녹스 사건과 웨이드 사건 사이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로저 웨이드는 자신의 집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표면적으로는 자살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로는 의심한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챈들러가 살인사건을 곧바로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건이 계속해서 살인인가? 자살인가? 누가 거짓말하고 있는가? 라는 형태로 변한다. 그리고 아일린은 말로에게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말로는 더욱 깊이 파고든다. 말로가 조사하면서 테리 레녹스와 폴 마스턴(Paul Marston)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즉 레녹스는 자신의 정체와 과거를 감춘 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일린은 과거 레녹스와 결혼했던 여자였다. 그녀는 레녹스가 전쟁에서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남자인 로저 웨이드와 결혼했다. 그런데 어느 날 레녹스가 살아서 나타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레녹스가 이미 실비아 레녹스와 결혼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아일린에게 레녹스는 단순한 옛 남편이 아니라 잃어버린 과거의 사랑이었다처음에는 테리 레녹스가 아내 실비아를 살해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말로의 조사를 통해 이 결론은 바뀐다. 아일린은 처음에는 로저가 실비아를 죽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말로는 그녀의 이야기에 논리적 허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결국 말로가 내놓는 결론은 충격적이다. 실비아를 죽인 사람은 아일린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로저 웨이드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었다. 아일린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추기 위해 여러 가지 거짓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녀는 결국 자살하고,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는 글을 남긴다. 말로는 그 자백을 세상에 공개하여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레녹스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한다. 그런데 말로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레녹스는 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실비아 살인을 자백했는가왜 자살한 것처럼 꾸몄는가? 그리고 왜 말로에게 돈을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말로는 결국 멕시코로 간다. 그곳에서 레녹스의 죽음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레녹스는 살아 있었다. 레녹스는 자신의 죽음을 조작했던 것이다. 그는 실비아와의 관계와 사건에 얽혀 있었고, 자신이 죽은 것으로 꾸미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레녹스는 자신의 죽음을 이용해 법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돈과 새로운 삶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말로는 그가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레녹스는 말로의 우정과 희생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말로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왔는데도 레녹스는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격분한 말로는 레녹스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말로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자신만의 도덕적 정의를 실행한 것이다.

 

 

기나긴 이별은 누구와의 이별인가?

제목의 기나긴 이별은 단순히 말로와 레녹스가 헤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층위의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말로와 레녹스의 이별이다. 배신자 레녹스를 말로가 죽였으니 그동안이 기나 긴 세월의 이별인 것이다. 둘째, 말로가 믿었던 우정과의 이별이다. 셋째, 말로가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낭만적 믿음과의 이별도 포함될 것이다. 넷째는 말로 자신의 과거와의 이별일 수도 있다. 이 이별은 처음에 레녹스라는 친구와 헤어지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그와의 시간을 보냈던 과거의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이별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나의 생각

나는 기나긴 이별을 읽고 받은 이 소설의 매력적 트릭은 레녹스의 위장 가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추리 장치는 레녹스의 가짜 자살이 말로를 속였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었다. 대개의 독자는 경찰의 발표와 자살 유서 때문에 레녹스가 죽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 죽음은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한 레녹스의 속임수 장치였다. 이것은 매우 세련된 미스터리 장치이지만, 작가 챈들러는 이를 단순한 퍼즐이 아니라 인물의 배신과 결합시켰기 때문에 나는 상당량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면 말로라는 인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작품의 주인공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는 복잡다단하다. 말로는 강하고 동시에 냉소적이며 세속적이면서 그러나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세계의 돈을 받지만 하지만 돈 때문에 자신의 원칙을 버리지는 않는 인물이다. 말로는 세상을 믿지 않지만 인간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는 경찰이나 법보다 친구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레녹스가 그 믿음을 배신했고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되어 버린다. 결국 이 소설의 진짜 비극은 살인사건이 아니라 우정과 신뢰의 붕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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