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담 보바리』를 추리소설로 읽어보기
욕망이라는 범인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표면적으로는 엠마의 간통과 결혼생활의 실패를 다룬 사실주의 소설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이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독자에게 던져 놓고 그 사건의 원인을 역추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 사건은 살인이 아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삶을 파괴하게 되었는가 하는 미스터리다. 이 관점에서 『마담 보바리』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엠마는 왜 죽음을 선택했는가?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연인인가, 돈인가, 허영인가, 낭만적 환상인가, 아니면 그녀가 살아가던 사회 자체인가? 플로베르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단서를 흩어 놓고 독자가 그것들을 연결하게 만든다. 따라서 『마담 보바리』는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한 인간의 파멸을 일으킨 범인을 찾는 심리추리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심리의 저변에 엠마의 욕망이 자리한다고 할 수 있다.

엠마의 비범한 욕망
엠마는 시골 의사 샤를 보바리와 결혼한다. 샤를은 성실하지만 평범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인물이다. 반면 엠마는 소녀 시절부터 연애소설과 낭만적 세계에 매혹되어 있었다. 그녀가 결혼을 통해 기대한 것은 남편과 함께하는 평범한 가정생활이 아니었다. 사랑, 여행, 사교계, 사치, 열정, 고급스러운 물건, 운명적인 연애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그녀가 상상했던 세계와 전혀 다르다. 샤를은 엠마에게 안정은 주지만 환상을 주지 못한다. 엠마가 경험하는 현실과 그녀가 머릿속에서 기대했던 현실 사이의 간격이 점점 커진다. 바로 여기에서 첫 번째 추리 문제가 발생한다. 왜 엠마는 평범한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하는가? 플로베르는 이 질문에 대한 단서를 엠마의 독서 경험과 욕망에서 찾게 한다. 낭만적인 문학이 엠마에게 현실보다 더 강렬한 삶의 이미지를 제공했고, 엠마는 현실을 그 이미지와 비교하기 시작한다. 엠마의 문제는 문학적 독서 자체보다 현실을 측정하는 기준이 현실 바깥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에 있다.

욕망의 과감한 실천
통상적으로 추리소설에는 보통 범행 동기가 존재한다. 그런데 『마담 보바리』의 범행 동기가 살인자의 증오나 돈 욕심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불만과 이상적 삶에 대한 욕망이다. 엠마는 현실을 살면서 계속해서 다른 삶을 상상한다. 결혼생활은 불만스럽고 그 불만은 새로운 사랑을 갈구하게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과의 화려한 환상은 과소비와 부채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부채를 자추려는 거짓말과 고립과 자살의 선택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인과관계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녀이 욕망을 실천으로 옮긴 결과인 것이다. 엠마의 죽음은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아니고 작품 전체에 걸쳐 범행의 조건이 조금씩 만들어진다. 이 점에서 플로베르는 추리소설의 복선 기법을 매우 정교하게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연인 로돌프의 함정
작중에서 엠마는 로돌프와 관계를 맺는다. 로돌프는 엠마가 꿈꾸던 열정적인 남성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자는 점차 그가 엠마만큼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플로베르가 만드는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엠마가 보고 있는 로돌프와 독자가 알고 있는 로돌프는 동일한 인물인가? 엠마에게 로돌프는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독자에게 로돌프는 훨씬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다. 이것은 추리소설에서 말하는 시점의 트릭과 비슷하다. 사건의 진실이 숨겨진 것이 아니라 인물의 인식 속에 진실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엠마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독자는 로돌프의 행동을 통해 그 사랑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알아차린다. 『마담 보바리』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로돌프가 엠마를 버리는 부분이다. 엠마는 로돌프와 함께 도망갈 것을 기대한다. 그녀에게 이것은 현실을 탈출하는 결정적 순간이다. 그러나 로돌프는 떠나지 않는다. 그는 엠마에게 이별 편지를 보낸다.
두 번째 연인 레옹
로돌프에게 버림받은 뒤 엠마는 레옹과 다시 관계를 맺는다. 이때부터 독자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첫 번째 사건과 두 번째 사건의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레옹과의 관계가 처음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느 정도 미래를 추리할 수 있다. 이것은 반복형 복선이다. 추리소설에서 동일한 범행 패턴이 반복되면 탐정은 범인의 행동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마담 보바리』에서도 독자는 엠마의 행동 패턴을 파악함으로써 그녀의 미래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마담 보바리』를 추리소설로 읽을 때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오히려 연인들이 아니라 상인 뢰뢰(Lheureux)다. 뢰뢰는 엠마에게 물건을 사고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유도한다. 처음에는 사소한 소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은 소비가 쌓이면서 부채가 거대한 덫으로 변한다. 이것이 작품의 경제적 트릭이다. 독자는 처음부터 엠마가 살인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돈의 흐름을 추적하면서 그녀가 점점 빠져나오기 어려운 구조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추리소설적으로 보면 뢰뢰는 전형적인 간접적 범행 설계자처럼 보인다. 그는 엠마를 직접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엠마가 스스로 무너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따라서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엠마를 죽인 것은 비소인가, 아니면 그 이전부터 그녀를 조여 온 부채인가? 이 질문이 바로 『마담 보바리』의 사회적 추리를 유도하는 것이다.
사랑과 돈의 관계
엠마는 사랑을 위해 돈을 쓰고, 돈을 쓰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행동을 한다. 따라서 사건의 구조는 점점 복잡해진다. 특히 엠마는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남편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 샤를 역시 진실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결국 엠마는 경제적 파산과 인간관계의 붕괴 속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는 약국에서 비소를 가져와 삼킨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비소가 작품 초반부터 등장하는 물질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독자는 뒤늦게 그 물질이 이렇게 사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배치는 전형적인 소품형 복선으로 읽을 수 있다. 추리소설에서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가 있다. 사건이 발생한 뒤 갑자기 등장한 증거가 아니라, 사건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사물이 나중에 의미를 바꾸어야 한다. 비소는 처음에는 약국에 있는 평범한 물질이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죽음의 도구가 된다. 이처럼 사물의 의미가 사건에 따라 변하는 방식은 추리적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
엠마의 죽음
엠마의 죽음 장면은 이 작품의 최대 클라이맥스다. 그러나 전통적인 추리소설과 달리 살인범은 없다. 엠마가 스스로 비소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추리소설적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반대로 볼 수도 있다. 플로베르는 독자에게 더욱 어려운 문제를 제시한다. 자살이라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왜 자살했는가? 법적으로는 사건이 해결된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마담 보바리』의 독특한 심리추리다. 엠마가 죽었다고 해서 소설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뒤에 또 하나의 추리가 시작된다. 샤를은 아내의 죽음 이후 점점 무너진다. 그리고 마침내 엠마가 자신에게 숨겼던 관계와 생활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는 엠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 그리고 막대한 빚을 남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이해한다. 여기에서 작품의 추리 구조는 역전된다. 생전에 엠마는 남편에게 자신의 삶을 숨겼다. 죽은 뒤에는 남겨진 물건과 흔적들이 엠마의 삶을 폭로한다. 즉 죽은 사람이 남긴 흔적을 통해 생전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사후 추적 구조와 상당히 유사하다. 엠마가 죽고 샤를도 몰락한다. 딸 베르트의 삶 역시 비참해진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장 성공하는 인물은 약사 오메이스(Homais)다. 그는 샤를과 경쟁했던 인물이며 과학과 진보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간다. 결국 작품의 마지막은 엠마의 비극보다 오메이스의 사회적 성공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끝난다. 마지막에는 오메이스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사실이 제시된다. 이것은 엄청난 추리적 아이러니다. 독자는 엠마의 삶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면서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악한 사람은 반드시 벌받지 않는다. 성실한 사람은 반드시 보상받지 않는다. 진실을 추적한다고 해서 정의로운 결말이 반드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독자는 모든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면 세상은 과연 정의로워지는 가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정의롭고 선하게 보였던 샤를르 집안은 몰락하고 악으로 보인 오메이스가 성공하는 모습으로 대단원이 장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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