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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청호의 단편집 <질병과 사랑>은 타이틀 단편을 포함해 모두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상 그의 작품은 스토리의 구성력보다는 이미지와 감각이 혼재돼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라인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또 작중에서 왕왕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것이 서사적으로 결론나지 않는다. 단편집 <질병과 사랑>에도 기존에 보여준 박청호 특유의 독특함이 묻어있다.
박청호의 세번째 소설집 <질병과 사랑>(문학과지성사)은 권태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중독된 사랑을 택한 현대인들의 일상을 주로 그렸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권태와 고통은 근본적으로 진정한 대화상대를 찾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들이 돌파구로 택한 일탈적 연애는 또 다시 인간관계의 소통부재라는 고통을 안긴다. 마치 시지프스의 고뇌처럼 그러한 일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타이틀작품인 <질병과 사랑>에서 주인공은 낙태하러 병원에 갔다가 수술을 담당한 의사와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곧 권태와 냉담에 빠진다. 덧없고 환멸적인 감정보다 육체의 감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다시 옛 애인을 만나 섹스를 한다. 그녀의 첫 남자는 세번째 남자가 됐다. 누구의 아이인지 확실치 않은 임신을 한 그녀는 남편에게 구타를 당한다. 인물은 비현실적이고 그가 추구하는 삶고 그 방식은 삶을 규정하는 소위 사회적 담론과 위배된다. 그것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신을 삶을 담아가는 과정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박청호의 이번 소설에는 원조교제하는 여고생과 은행털이 남학생들<달콤한 인생>, 여자의 몸에 질린 나머지 여자목욕탕을 훔쳐보면서 성욕을 느끼는 산부인과 의사<사랑의 아픔>, 옛애인의 원룸에 기거하면서 그녀의 몸을 탐하는 실업자<몸의 사랑>, 이혼을 앞두고 누군지 모르는 애를 밴 임산부와 여행을 떠나는 남자<조금 춥고 쓸쓸한> 등 척박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모든 조건으로부터 탈출하고자 몸부림치며 이 세계에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온몸으로 역설한다. 작가는 영화적 서사와 이미지를 구사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교란된 몽환적 분위기 속에 이들을 던져놓는다.
작가는 스스로 이작품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번 작품에는 스토리가 있는 글쓰기를 시도한 달콤한 인생과 같은 글이 포함되어 있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죠. 예전에 썼던 단 한편의 연애소설이나 갱스터스 파라다이스 등은 더 읽기 힘들었다고 해요-
박청호의 주문은 간편하고도 쉽게 소설에 중독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으니 독자제군에게 마음껏 빠져들라는 것이다. 박청호의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이 생략된 듯한 글들은 다분히 시적이다. 또 그의 작품에는 남녀간의 사랑이 자주 등장한다. 전작인 <갱스터스 파라다이스>에서는 남과 북 사이의 순수한 공간 DMZ에서 남한 병사가 고용한 창녀와 북한 병사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있었고, 이같은 시선은 <질병과 사랑>의 곳곳에 나타난다.
-제가 표현하는 성은 에로 영화 같은 눈요기 거리가 아닙니다. 결코 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죠. 다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서 가장 밀착된 방법이 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여러가지를 표현하는 거예요. 또 철저한 개인주의가 성행하는 이 사회에서는 문제의 발단을 일으키는 중심에 성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질병과 사랑>, <몸의 사랑>, <사랑의 아픔>은 동일한 범주에서 사랑을 왜곡된 소통관계로 설정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환몽적이거나 비현실적이다. 쟝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오늘날 모든 것은 이미지 형태를 띠고 있으며 현실은 과다 이미지 아래 실종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의미로 이미지를 죽이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박청호의 단편에 적용시키면 그는 이미지를 모으는 컬렉터로서 일상과 현상의 경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여줄 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질병과 사랑>에서 그는 과거와 현재를 허물며 시간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방법으로 소설의 정돈된 줄거리를 찾아보려는 독자들을 거듭 혼란에 빠뜨린다. 꿈의 모티브나 등장인물의 내면적인 환상을 삽입함으로써 시간적 순서에 의한 기존 서사방식의 틀을 허물어내고 있는 것이다.
가령 <달콤한 인생>에서는 산동네에 사는 가난한 고등학생 동수의 꿈이 펼쳐진다. 만원 짜리 지폐를 여러 장 줍는 꿈을 꾼 동수는 친구들과 함께 극장과 은행을 털기로 한다. 그러나 금고는 늘 비어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돈에 대한 애착은 대문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돈을 보는 꿈으로 변주된다. 꿈은 그에게 모사된 현실이다. 마치 영사기가 필름을 돌리듯 소설은 무수한 찰나의 장면들로 점철된다. 보드리아르의 가설처럼 오늘날 사회는 지속적으로 무수히 생산되고 있는 다양한 상징 및 기호들의 작용과 그로 인한 주체와 객체간의 혼동을 지적한다. 마치 대규모 할인매장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충동구매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물건을 사는 주체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 보았던 광고, 즉 상징체계나 기호의 무의식적 작용에 의해 구매 계획에도 없던 물건을 순간적으로 구입하게 되는 객체화 과정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광고가 나로 하여금 그 물건을 사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경우 나는 주체가 아닌 객체로, 그 광고는 객체가 아닌 주체로 자리바꿈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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