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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幻)을 소재로 한 김채원의 중단편 연작 소설집 <가을의 환>은 십여 년만에 완성된 작품집이다. 198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겨울의 환'을 비롯, '봄의 환', '여름의 환', 그리고 가장 최근작이며 미발표작인 표제작 '가을의 환'이 실려있다. '환(幻)'은 사전적으로 '변하다, 미혹하다, 홀리게 하다, 허깨비'란 뜻으로 작중에 환상의 분위기가 드러난다. .
그녀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작품 「겨울의 환―밥상 차리는 여인」을 비롯해서 남녀 주인공이 전화로만 소통하고 직접 만나지는 말자고 약속하는 내용의 표제작 「가을의 환」 「봄의 환」, 1998년 출간된 바 있는 중편 「미친 사랑의 노래」 「여름의 환」등의 모두 네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김채원의 환의 서사는 삶의 허약성에 대한 슬픈 확인과 존재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통해 지속된다. 미약하고 불안한 상태가 환의 서사를 지탱하는 바탕이다. 때문에 극적인 사건이나 치밀한 구성보다는 화자의 머뭇거리는 몽환의 태도가 존재한다. 작중 인물들의 이름이나 삶의 내력 역시 비어 있거나 최소한의 정보만이 표시된다. 환의 서사의 진짜 주인공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삶과 존재의 본질인 환(幻) 자체이다.
이처럼 환幻은 그녀의 소설 세계에서 한없이 불투명한 인간 존재의 실체와 삶의 본질이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으며 단지 하나의 영상-환일 뿐이다.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기억조차도 환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와 과거’ ‘너와 나’를 넘어서는, 고백체의 언어는 여기 지금의 서사를 과거의 기억들과 혼재시킨다. 내 운명은 어머니의 운명, 그리고 조상들의 운명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과 삶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김채원의 시선은 섬뜩하도록 깊고 예리하다. 한없이 머뭇거리는 고백의 문장은 아스라히 일어나는 모래먼지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 관찰 대상에 실패감에 젖은 중년 여성들의 일상과 내면 풍경이 환영처럼 놓여있다. 환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중년의 여성으로, 패배감과 일상에서 늘 실패의 기분을 맛보며 상처와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녀들에게는 삶의 어떠한 가능성도 없어 보이며 오직 불안과 혼돈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들은 또한 일상에서 어쩔 수 없이 관계하는 이들과 불화한다. 늙은 어머니와는 끊임없이 싸우고 남편은 이혼 후 새로운 가정을 꾸려 살고 있거나 출장중이다. 자매는 이곳이 아닌 먼 곳에서 잊혀진 듯 살고 있으며 몇 년에 한 번씩 나를 찾아오며 살아간다. 그리고 내게 절망감을 남겨준 채 떠나간다. 내가 낳은 아이는 말을 도무지 안 듣는다. 이렇듯 타인은 내가 아니고 타자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인간이란 타인이라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또다른 존재로서의 더 거리감이 있는 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김채원의 환의 서사는 개인과 사회, 여성과 남성, 중년과 청년, 과거와 현재 등의 층위를 두루 포괄하려 하는 점에서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심에는 항상 존재의 정체성과 타자와의 관계라는 본질적인 문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작가에게 주어지는 형이상학적 물음은 무에 대한 물음이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넘어서 그것의 존재 근거를 묻는 것이지만 그 존재 근거는 존재자를 바라보는 작가에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세계의 바탕인 무는 지각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논리적 사유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논리적 사유는 무엇에 대한 사유인데 반하여 창작의 시발점인 무는 그러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논리적 사유를 넘어서는 현존재의 근본적인 경험의 세계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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