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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 꽃>하성란 -마이크로에 숨은 마크로

소설책

by 북스톰 2023. 9. 15.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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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 꽃>하성란 -마이크로에 숨은 마크로

 

곰팡이의 아름다움

     우리소설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소설은 어떤 작품이며 왜 그것이 아름다운 것일까? 그 답은 우리 소설세계에 관련된 부분들, 가령 작가, 비평가, 독자, 출판업, 문학상 등으로 가늠해볼 때, 문학상 수상작과 인기작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작품들은 대개 다수의 전문적인 혹은 일반적인 독자가 미를 추구하는 예술의 한 장르인 소설에서 공감하는 부분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대상작품을 압축하다 보면 우리는 하성란의 <곰팡이꽃>이라는 단편을 만날 수 있다.

     작품의 스토리라인은 매우 간단하다. 서민 아파트에 사는 한 남자가 타인의 쓰레기를 통해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텍스트에서 친절하게도 서술을 통해 밝히고 있는 사회학의 한 방법론으로서, 특정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쓰레기를 분석하는 소위 <가볼러지>를 작중 주인공이 실천에 옮기고나서 그 덕분에 실제 타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다. 때문에 작중 내내 쓰레기의 악취가 독자의 코를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작중화자는 주인공이 쓰레기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진실 찾기라는 행위에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자신의 쓰레기를 통해 자신의 속내를 알게 되고, 나아가 타인의 쓰레기를 통해 그 사람의 진실과 만나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세계 통찰은 미세한 부분 부분을 오랜 시간을 두고 통찰하는 놀라운 세계인식의 방법을 보여준다. 소설이 아직 이름지어지지 않은 우리의 새로운 체험을 명명해주는 작업이라면 <곰팡이꽃>은 분명히 그 일을 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쓰레기를 뒤지는 행위가 형상화된 이 소설이 과연 아름다운가. 이 답을 찾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인 것이다.

 

상징을 형상화한 이미지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곰팡이 꽃은 작중의 중요한 단어이다. 그 단어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썩은 음식물이 부패하여 거기에서 자라난 균사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또다른 이미지를 투사하고 있다. 곰팡이꽃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부패를 의미하는 곰팡이와 새 생명의 잉태를 암시하는 꽃이라는 중의적인 다원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소설에서 특별히 장치화되어 있는 것이다.

     통상 이미지는 대상을 비판하거나 은폐된 무언가를 고발하기 위해 특정한 대상을 일 대 일로 그리는 알레고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때의 이미지는 작중에서 다른 그 무엇을 비유하게 된다. 그러나 상징의 경우 그 이미지의 사용방법이 다르다. 이미지처럼 다른 한 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으로 수많은 대상의 의미로 확산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가령 곰팡이의 이미지가 비유해낸 것이 썩은 음식을 은유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버린 음식의 부패라는 내용에 국한 될 뿐이다. 그런데 곰팡이꽃이 상징해내는 바는 훨씬 다양하다. 그 이미지에는 시간, 공간의 흐름이 개입되어 나타나고 있다.

 

곰팡이꽃의 의미

     <곰팡이 꽃>에서 구애의 선물로 준 케익크에 핀 곰팡이 꽃은 곧 타자의 쓰레기이고 그것은 자아와 단절된 세계의 모습으로 유추될 수 있다. 비유과정은 일견 그럴듯하지만 그러한 결론은 절대공간에서 순간적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시 장르에 가까운 이미지 인식이 되고 만다. 거구의 사나이가 최지애에게 쏟아붓는 구애행위가 단절, 소외 등의 단편적인 이미지가 되어서는 삼인칭 서술화자의 관찰 과정이라는 소설적 시간과 유리된다. 작가는 그들만을 보고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켜서 그들의 세계 보려고 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곰팡이 꽃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버려진 케이크가 오랫동안 방치되어야만 부패가 된다. 곰팡이꽃이라는 매개어가 그 취의(趣意)로 삼은 이미지는 여러 대상으로 확산되어 있어서 그 상징의 추적이 작품 이해의 관건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집에서 나온 썩은 밥에서 본 곰팡이며 썩을 대로 썩어서 물크러진 감자와 케이크 속의 곰팡이꽃 등은 일련의 추이를 갖고 있다. 그것은 추구, 외면, 방치, 소외, 부패, 발효 등의 시간 개념이 필요하고 그러한 이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사의 흐름이 함축된 상징성을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사적 흐름, 다시 말해 그 어떤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의 끝을 향해 시간과 공간이 전개되는 방식으로 스토리의 전말이 보이게 된다. 이때 곰팡이꽃이라는 매개어는 시적인 이미지의 확립이 아니라 소설적인 이미지의 확산인 상징이 되는 것이다.

 

소설의 상징성

     소설에서의 상징은 시와는 다소 다르다. 상징을 정의하면 다른 어떤 것을 표상하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은 우리 밖의 어느 것이면서 우리 안에 있게 된다. 상징언어란 내적 체험을 마치 감각적 체험처럼, 사물들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양, 그것들이 우리에게 행하고 있는 양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상징언어란 외적 세계가 내적 세계를 상징하며, 영혼과 정신을 상징하는 언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상징과 상징되어지는 것의 관계이다. 그 관계성은 복합적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이것은 상징이 인간의 체험과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물질적 세계의 현상이 내적 체험의 표현이 된다는 이론과 궤를 함께 하는 시각이다. 이때 상호관계는 시간적 흐름을 두고 파악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가 소설에서 상징된다는 것은 서사적 구조 즉,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라는 조건 하에서의 문제인 것이다.

 

마이크로한 세계의 이미지

     이미지를 상징화하면 고정된 이미지는 일정한 상징체계를 타고 흐르게 마련이다. 때문에 상징화된 대상은 어느 정도 명확하지만 그 뒤에 놓여 있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분석해내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더욱이 작중에서 곰팡이꽃이라는 이미지는 시간을 두고 그 대상이 썩고 다른 것으로 살아나는 것이기에 흡사 불교적 윤회와도 같이 순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과일이 방치되고 그 생명이 다하면 부패하고 결국 부패된 곳에서 새 생명이라할 수 있는 곰팡이 꽃이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삶과 죽음을 시간의 흐름인 순환적 입장에서 인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편소설에서 그러한 오랜 시간을 장편소설처럼 일일이 풀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곰팡이 꽃>에서는 무궁무진한 시간의 변주를 상징이라는 압축장치에 집어넣은 것이다. 구애와 거절, 오해와 이해, 밝은 곳과 그늘진 곳, 향기와 악취, 사랑과 증오, 거짓과 진실 등의 모든 이야기의 거대함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곰팡이 꽃이라는 마이크로의 세계로 재구성된 것이다. 기나긴 시간을 짧은 순간으로, 또한 커다란 사건을 압축된 쓰레기 봉투 안으로 집어넣은 하성란의 솜씨는 소설이라는 예술장르가 왜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증좌인 동시에 바로 이 형상화에 <곰팡이꽃>의 아름다움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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