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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신라시대 최고의 스님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원효대사와 의상 대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두 스님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과연 의미 있고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두 대사의 법력이나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은 두 스님을 실로 세속의 범부들이며 그야말로 민중 즉 지위가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한 위대한 불교계의 스승들이라 할 만하다. 원효와 의상이라는 두 걸출한 스님들에 의해 우리나라 불교계가 커다란 진전을 보았다는 평가가 그것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원효대사는 617년생이다. 진평왕 39년에 태어났고, 당시에는 신라가 바야흐로 삼국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한 무렵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변방의 시골 출신이었으며, 출산에 임박하여 이웃 마을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어머니가 갑자기 해산을 하게되었고, 아버지가 옷을 벗어 나무에 건 다음 그 안에서 출생했다. 탄생 자체가 극적인데, 평생을 기층 민중과 함께 살다간 실천적 수행자였던 그로서는 탄생부터 그런 재야의 운명을 지닌 모양이다.
한편 의상대사는 625년생이니, 원효보다 여덟 살이 어리. 진골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가령 누구의 아들이라고나 왕자의 신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의상대사는 융합적 사상을 바탕으로 그가 창도한 화엄 교단에서 기층민 출신의 제자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는 강한 신분질서가 유지되던 시점에서 교단 내에서의 평등 보장은 일반민에게는 희망의 대상이었다. 결국 의상대사는 원효대사와 유사하게 민중속의 삶을 살아간 고승이었다.
의상대사가 두 번에 걸쳐 중국 유학을 시도했고, 결국에 종남산의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 602~668)을 만나 득도한 사실은 기록으로 전해온다. 이때 원효와 동행하여 중국 땅 변방에서 경험한 해골바가지 사건은 우리에게 감동적인 스토리로 알려졌지만, 확실한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몇몇 묘비등의 비공식적 기록을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에 들어가려 시도한 연도는 650년과 661년이다. 650년에 원효와 함께 가고자 고구려에 이르렀지만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 재차 도전한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지엄대사를 만나 화엄을 공부한 것은 두 번째 시도였던, 661년으로 보인다. 의상대사가 삼십대 중반의 나이였다.
두 스님은 불교계의 큰 별들이었다. 원효대사가 감성적이라면 의상대사는 이성적이다. 원효와 달리 의상은 귀신 따위로 마음을 흩뜨리지 않고 정진하는 스타일이었다. 몇몇 지방 설화들에서 나타느는 것 처럼 의상대사 굳은 마음을 칭송하고 원효대사에게서는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원효에게는 직관(直觀)을 중시한 원효의 길이, 의상에게는 통철(洞徹)을 중시한 의상의 길이 있었다.
두 스님이 관련된 이야기로서는 양양에 있는 낙산사 관음보살이야기에서 잘 나타난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이 동해 바닷가 굴 안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지금 의상대 옆 홍련암 아래에 있는 굴이다. 칠일간의 기도 끝에 의상은 보살이 보낸 동해용을 만나 선물을 받는다. 그러나 의상은 칠일을 더 기도한다. 십사일간 먹지 않고 자지 않고 기도한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용이 아니고 관음보살을 만나는 것이었다. 결국 관음보살은 의상을 굴 안으로 불러 그 모습을 보여주며, 산 위에 절을 지으라 했으니 그절이 바로 지금의 낙산사이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상대사의 관철력과 강한 의지가 돋보이는 이야기이다.
그 소문을 듣고 원효가 양양으로 찾아온다. 오는 길에서 들판에서 가을걷이 하는 여자에게 다가가 벼를 달라해서 먹기도 하고,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여자에게 물을 달라며 농담도 한다. 원효대사는 놀러나온 사람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동해안 굴로 가는 길에 만난 이 여자들이 사실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관음보살의 시험에 보기 좋게 걸려들고 실제로 관은보살을 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들판에서, 빨래터에서 고생하는 여인네를 복보아주고 농도 하면서 길을 간 것이다. 관음보살보다 민중이 먼저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원효대사는 오히려 민중의 마음 깊숙이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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