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스 르블랑의 장편소설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
거대한 함정에 관한 이야기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는 미국의 범죄조직이 전설적인 괴도 아르센 뤼팽의 막대한 재산을 노린다는 이야기이다. 뤼팽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오히려 그가 마피아 조직 안으로 잠입한다. 그리고 자신을 추적하는 마피아 범죄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은신처와 재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뤼팽은 자신의 재산을 노리는 역으로 마피아를 관찰하고, 그들의 조직구조와 인물관계를 조사하며, 그들의 계획을 역이용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자신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수사하는 범죄자가 된다. 이것이 『수십억 달러』의 가장 중요한 추리소설적 특징이다.
스토리 속으로
소설의 앞 부분에는 뉴욕을 중심으로 여러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지만, 피해자들에게서 동일한 형식의 수첩과 이상한 이름이 발견된다. 그 이름은 바로 Paule Sinner이다. 여기서 기자 패트리샤 존스턴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건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낸다. 이것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분산된 단서의 통합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이름 자체가 암호라는 점이다. ARSÈNE LUPIN이라고 나열한 글자의 이름이 PAULE SINNER라는 또 다른 열한 글자의 이름으로 변형되어 있다. 즉 Paule Sinner는 실제 여성의 이름이 아니라 뤼팽을 가리키는 암호였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도 패트리샤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사건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이 장치는 추리소설에서 말하는 문자적 단서(letter clue)의 전형적인 형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뤼팽다운 트릭은 호라스 벨몽(Horace Velmont)이라는 인물을 만든 것이다. 독자는 처음에 호라스 벨몽을 독립적인 인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패트리샤에게 사건의 배후를 설명하고, 마피아의 조직을 분석하며, 뤼팽의 재산을 노리는 자들의 계획을 추적한다. 따라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호라스 벨몽이 뤼팽을 돕거나 추적하는 인물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바로 아르센 뤼팽 자신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핵심적인 정체 위장 트릭이다. 뤼팽은 경찰을 속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독자까지 속인다. 이 점에서 르블랑의 추리기법은 변장술을 넘어 인물의 신원을 감추고 독자가 인물을 해석하는 것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마피아는 뤼팽을 잡으려고 하지만 뤼팽은 마피아를 조사한다. 또 마피아는 뤼팽의 재산을 훔치려고 하지만 오히려 뤼팽은 마피아가 자신의 재산을 훔치려는 과정을 이용해 마피아의 조직을 파악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뤼팽이 마피아에게 자신의 은신처와 재산에 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제목에 나오는 수십억은 단순한 거액의 의미를 넘어서서 마피아를 행동으로 끌어들이는 미끼가 된다. 마피아는 뤼팽의 재산이 은행의 금고 안에 안전하게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파리의 은행 금고에 접근한다. 그곳에 수많은 마피아 조직원이 모인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뤼팽이 설계한 거대한 사냥터다. 정작 사냥꾼이라고 생각했던 마피아가 사실은 사냥감이 된 것이다. 마피아 조직원들이 은행의 금고에 모여, 그들은 뤼팽의 재산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Paule Sinner 11번’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신원을 숨긴 채 조직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가면과 수염을 벗는다. 정체는 바로 아르센 뤼팽이다. Paule Sinner 11번 회원, 호라스 벨몽, 뤼팽의 수십억달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인물에게 집중된다. 금고 앞에서 뤼팽은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자신은 마피아 조직이 노리고 있는 재산의 소유자이며, 동시에 조직의 규칙과 주식 구조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 즉 마피아는 자신들이 뤼팽의 재산을 빼앗으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뤼팽의 논리에서는 오히려 그 조직 전체가 뤼팽의 재산을 관리하는 장치처럼 변해버린다. 그는 자신이 조직의 지분을 사실상 전부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금고의 돈을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선언한다. 뤼팽은 자신의 명성과 위압감 때문에 마피아들이 자신에게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그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결국 총성이 울리고 뤼팽은 다리에 총을 맞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뤼팽은 미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죽은 사람처럼 처리된다. 그는 맥 앨러미 주니어의 요트를 습격하고, 경찰에게 쫓기다가 바다로 뛰어든 것으로 보도된다. 경찰은 그가 익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독자는 뤼팽이 그렇게 쉽게 죽을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곧바로 신문에는 또 다른 사건이 보도된다. 맥 앨러미 주니어는 묶여 있고, 그의 금고에서는 돈이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뤼팽의 서명이 남아 있다. 또한 뤼팽은 경찰관 가니마르의 옷을 빼앗아 도망간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패트리샤의 집에 뤼팽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타난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 이것은 뤼팽 소설에서 반복되는 가장 고전적인 트릭인 가짜 죽음(fake death)과 신분 교체의 방식이다. 패트리샤에게는 아들 로돌프가 있고, 뤼팽은 자신의 범죄자라는 신분 때문에 아이에게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제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패트리샤가 헨리 맥 앨러미 주니어와 결혼하도록 설득한다. 그 결혼은 로돌프에게 안정된 이름과 재산을 주기 위한 뤼팽의 전략이다. 그러나 결혼은 6개월 뒤에 이루어지기로 하고, 그동안 뤼팽과 패트리샤는 함께 지낼 수 있게 된다. 결국 둘은 행복을 약속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작품의 추리기법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 의 추리기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암호명 Paule Sinner이다 이 암호를 통해 뤼팽이 정체를 숨기게 된다. 그것은 문자 배열의 트릭으로 ARSÈNE LUPIN의 순서르 바꾸고 조작하여 PAULE SINNER를 만들어낸 것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암호로 변환한 것이다. 그리고 마피아 내부에서 그는 가명을 사용한다. 스스로를 Horace Velmont라고 부르는 뤼팽은 자신을 별개의 인물처럼 보이게 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Horace Velmont역할을 하면서 정작 ARSÈNE LUPIN에 대한 마피아의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변장으로 상대방을 속이고 소위 가짜 죽음을 연출하여 바다에 투신한 것처럼 속인 것도 큰 트릭이다.
독자를 속인 뤼팽
뤼팽 소설의 독특한 점은 독자가 탐정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데 독자는 뤼팽이 무엇을 계획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뤼팽이 마피아 집단을 역으로 속이는 『수십억 달러』는 뤼팽이라는 인물이 괴도에서 범죄 세계를 조사하는 탐정으로 발전시킨 데에 있다고 하겠다. 작중에서 뤼팽은 세 가지 역할을 한다. 그는 범인으로서 재산을 훔치고 탐정으로서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범죄조직을 조사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사건의 무대를 설계한다. 뤼팽은 사건에 참여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건의 연출자다. 마피아는 자신들이 사건을 진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뤼팽이 그들에게 역할을 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범죄자가 탐정이 되는 구성과 범죄자가 작가가 되는 스토리를 통하여 마피아는 물론이고 독자까지 속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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