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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방대하고도 매력적인 작품들은 그의 데뷔작인 <나자레를 아십니까>에서부터 출발한다. 일인칭 서술화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기차 안에서 화자인 <나>가 김선생과 우연히 마주 않게 된 어떤 사내와의 대회를 들으며 진행된다. 그러나 작중화자인 나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일인칭 보조인물 서술화자 시점인 것이다.
김선생은 사내에게 아는 체를 하면서 자기가 나자레라는 고아원 출신이며 그 사내도 그것 출신임을 암시하는 과거의 사건을 계속 주워섬긴다. 배고프고 춥고 무섭고 지루하고 무료했던 고아원에 대한 과거를 작가는 김선생의 입을 통해 참으로 맛갈나면서도 감각적으로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건과 고아원 원장과 고아원 원감으로 보이는 작은 아버지에 대해서 줄곧 이야기를 하지만 마주앉은 사내는 끝까지 자기가 나자레 출신이 아니며 전혀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선생은 나자레 고아원의 기억을 되살리려 그 사내에게 별의별 소리를 다하지만 그 사내는 교묘히 부정을 한다. 김선생은 과거 고아원의 영웅이라던 형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내임을 암시하고 그형과 사랑에 빠진 여자와의 이야기로 추억을 더듬어 간다.
무섭기로 소문난 작은 아버지조차도 어쩔 수 없던 아이들이 영웅이던 형은 누나와 연애를 했고 둘은 공공연한 사이가 되었지만 앞날이 창창한 그 형은 누나가 반신불수가 되자 그녀를 버리고 연락을 끊었고 결국 멀리 떨어진 독방에서 울며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을 하게 된다.
형에게 버림받은 누나는 누군가에게 강제로 욕을 당하고 임신을 했으며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작은 아버지가 짐승처럼 묶여 어디론가 실려 갔다는 사실뿐이었다. 나중에 김선생이 당시로서는 열두살 때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형과 원장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서 전말이 밝혀진다. 원장아버지는 형과 이미 반신불수가 된 누나와의 결혼을 반대하여 만나지 못하게 하였고 원장으로서는 자신의 동생인 작은 아버지가 그녀를 건드려서 임신을 하게 되자 강제로 작은 아버지와 누나를 결혼하게 하였지만 결국 누나는 자살을 한 것이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원장아버지와 그의 동생 작은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인 형은 그녀의 죽음 앞에 일종의 공범 관계가 되는 것이다. 나자레로 상징되는 당대 우리사회는 폭력적이고 진보적인, 말하자면 구태를 고발하는 투명한 사회구조를 밝힐만한 사실은 사라졌다.
사회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과 맹목적인 힘과 습관과 편견을 에워싸고 뭉쳐있는 감정의 맹목적인 힘에 의해 그 결합이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라는 척도에 있어서 어떠한 진보도 불가피하게 사회의 보전에 이바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대체로 그 반대의 경향이 더 많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새로운 요소는 여러 면에서 낡은 본능의 작용을 부적합한 것으로 만든다.
이문열이 작품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바는 도덕적 자아의 온전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도덕적 자아의 문제가 어느 정도까지 정상적 수준으로 성숙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당대의 사회배경과 맞물려 결국 인간성의 정체와 존재까지 파고들기 때문이다. 작가는 과연 사내가 야간열차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하는 양심회복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가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타당한가 도덕적 자아의 완성인가는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그것은 작품 말미의 윤수원 투신자살에 관한 부분이 된다.
양심의 가책으로 평생을 떠돌다가 고민하던 그에게 갑작스런 기억이 자살을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면 이 문맥에서 도덕성 회복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중에서 형상화되는 이야기의 완결미는 도덕적 자아가 스스로를 회복하는 증거로써 자살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형이 누나를 배신하였고 그 자책으로 떠돌고 월남전에 자원 입대하여 정글에서 목숨을 건 전투를 치렀던 시간들로도 해소가 되지 않은 도덕적 자아의 완성은 결국 자기를 부정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라는 실체는 고정된 상태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논리는 개인주의적인 상식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도덕적 실천의 가치변화 다시 말해 성장,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세계관 등으로 이완되면서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개인적 도덕규준과의 자아와의 관계는 고정불변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 결단한 누나에 대한 배신은 개인주의적인 의미보다는 사회전반의 흐름에서 이해한다면 개인주의적인 논리를 아우르는 사회적 도덕주의의 부각이 바로 주제의식이 될 것이다. 이 도덕성은 다시 말해 폭력에 맞서는 방패역할임과 동시에 이문열 소설의 주제의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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